▲부산진일신여학교 부산 최초의 여학교이자 부산 만세운동이 처음 일어난 곳이다. 부산 좌천동은 근대 부산 여성운동의 근원지였다.
이병길
그들은 3·1운동으로 갇힌 민족지도자들의 사식 차입과 그 가족들의 생활 구제를 위하여 3·1운동 후 첫 비밀여성단체를 조직하였다. '혈성단애국부인회(血誠團愛國婦人會)'였다. 오현주의 언니 오현관이 회장을 맡았다. 이후 혈성단애국부인회와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가 합쳐서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로 통합했고, 1916년 6월 '대한민국에국부인회'로 조직이 확장되었다. 회장은 오현주, 언니 오현관은 고문이 되었다.
3·1 운동에 가담하였던 강낙원은 그 후 상해에 갔지만 임정의 독립운동과 군자금 모집에 회의를 느끼고 독립의 가망성에 회의를 가졌다. 희망을 품은 자에게 미래는 가까이 있지만, 회의하는 자에게는 절망의 현실만 가까이 있는 법이다. 그는 부인 오현주에게 애국부인회에서 손을 뗄 것을 거듭 권유했다. 오현주는 강낙원과 평소 잘 알고 지냈던 경상북도 경찰국 고등계 형사 유근수에게 부인회 회원 명단, 인장, 취지서, 본부 및 지부 규칙 등 증거 자료를 모두 주고 애국부인회의 조직과 활동을 털어놓았다. 11월 오현주의 정신여학교 동창생 김마리아 등 애국부인회 관련자 24명이 체포되고 이 사건으로 부인회는 해체되었다. "애국 여성 만세!"를 외치며 재판에 임했던 부인회원들은 모두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강낙원과 오현주 부부의 일회성 밀정 활동은 일제강점기 동안 많은 손가락질을 받았지만, 그들의 남은 삶은 편안했다. 강낙원은 권투와 유술(유도) 경기에서 권투가로 유명한 인도인을 비술로써 용맹하게 이겨버린 인물로 1921년 6월 신문에 보도되었다. 1921년에 한국 최초의 사설 도장인 조선무도관을 설립해 제자들을 가르치고, 1926년 12월 호기풍, 박재영, 여운형, 한진희 등과 민족적 원기(元氣)양성을 목적으로 조선현무회(朝鮮玄武會)를 창립하였다. 1927년 조선씨름협회를, 1934년에는 전조선아마튜어권투연맹을 창립하는 등 한국 체육계의 실력자로 부상했다. 해방 후인 1948년 11월 청총·서청·대청·독청·국청 등 5청년단체가 중심이 되어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이 결성되었는데, 강낙원이 핵심인물이었고 이승만의 배려를 받았다. 1949년에 강낙원, 오현주 부부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해 체포되었다.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부부 밀정의 이름은 역사에 기록되었다.
최천택, 부산 만세운동에 동분서주하다
김인태로부터 독립 만세운동 소식을 들은 최천택은 그날부터 분주하게 바빴다. 장지형(장건상 조카)에게 만반을 준비하도록 하고 그는 울산, 울주, 포항까지 가서 동지들에게 만세운동을 대비할 것을 알리고 대구에서 3월 1일을 맞았다. 대구의 서병소(徐炳昭), 서병무(徐炳武)에게 궐기할 것을 당부하였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가 당숙모 변봉금의 연지동 하숙집을 찾아갔다. 하숙집에서 알게 된 박희창, 강홍렬, 강낙원 등 20여 명의 동지와 함께 투옥자들의 뒷바라지를 하였다. 최천택은 독립만세운동에 가담하여 목숨마저 내놓은 수감자들의 의연한 태도에 김은 감명을 받았다.
최천택이 서울에 올라간 시점은 오택이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한 시기와 일치한다. 하지만 서로의 만남에 대한 기록은 없다. 아마 오택이 서울 만세운동을 하고 난 뒤 체포의 위험을 느낀 후 도피한 이후에 최천택이 서울에 갔던 것 같다. 최천택은 경성의학전문학교에 다니는 동산(東山) 김형기를 만나 당시 상황에 대해 자세히 들었다.
"반갑네. 그동안 만세운동을 준비한다고 수고가 많았겠네."
"아닐세, 조선사람이라면 당연해야 할 일이지 않겠나. 민족이 스스로 나라를 다스려 가야 하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지. 지금 조선은 온통 눈물바다가 아닌가? 내가 다니는 경성의전도 민족적 차별이 심하다네."
"그런가. 몰랐네."
"경성의전은 1916년 4월 20일 개교하였지. 조선인(50명)은 시험을 쳐서 입학하지만, 일본인(25명)은 모집 정원에 미달하면 무시험이라네. 세상에 이런 차별이 어디 있단 말인가? 또 일본인이 받는 교육과 조선인이 받는 교육이 다르다네. 그리고 조선인은 졸업하면 조선에서만 진료할 수 있지만, 일본인은 일본 제국 어디에서나 진료 자격이 있다네."
최천택은 경성의전에 민족적 차별 교육이 심하였음을 처음 알았다. 당시 김형기는 경성의전 학생대표로 학생단을 이끌고 만세 시위를 하는 주동자였다.
3월 1일의 만세 시위는 학생들의 참여기획과 준비를 한 학생단(學生團)이 없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자 YMCA 간사인 박희도의 주최로 1월 27일 중식집 대관원(大關園)에서 경상의전의 한위건과 김형기,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의 강기덕, 경성공업전문학교의 주종의, 경성전수학교의 이공후와 윤자영, 보성전문 졸업생 주익, 연희전문 전퇴생 윤화정 등 10명이 모여 만세운동에 대해 논의하였다. 2월에는 역시 민족대표 중 한 사람인 이갑성(李甲成)으로부터 해외 독립운동에 관한 정세를 듣고 학생대표들과 회합하여 만세 시위 운동 계획을 세웠다. 2월 중순쯤 각 학교의 학생 대표자로 경성의전의 김형기, 경성전수학교 전성득, 세브란스의전 김문진, 경성공업전문학교 김대우, 연희전문학교 김원벽, 보성전문학교 강기덕 6명이 선정되었다. 이 학생운동의 주도자는 실재 경성의전의 한위건(韓偉健, 1896~1982)이었다.
당시 경성의전은 2월 학년말 시험을 치르기 직전이었고 25일은 예비시험을, 3월 1일은 1학년 학생들의 조직학 시험이 예정되어 있었다. 학교 당국은 동경 2‧8 독립선언으로 학생들의 통제를 강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4학년으로 경성의전의 대표자인 김형기는 경성의전 학년별 대표를 설득하고 또 학생들 하나 하나에게 만세 시위 참가를 설득하여 시위에 나오도록 하였다. 당시 김형기는 재경 유학생 회장을 맡고 있어 그의 영향력이 컸었다. 그 결과 만세 시위에 다수의 경성의전 학생들이 참가하였고 가장 적극적으로 시위를 하였다. 3월 1일 시위에 김형기는 종로 종각 앞 사거리에서 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5일에는 남대문 인근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1919년 3월과 4월 시위 현장이나 하숙집 등에서 체포된 경성의전 학생은 40명이나 되었다. 독립선언서 및 청원서 관련으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심문을 받은 361명 중 경성의전 학생이 38명으로 다른 학교에 비해 가장 많았다. 재판과정에서 김형기는 김형기 외 209인, 김형기 외 24인 등 그는 피의자의 대표로 불리었다.
하숙생들이 검거되자 최천택은 도피하여 부산으로 돌아왔다. 부산에도 독립만세 운동이 벌어졌다. 부산은 경부선으로 인해 서울의 만세 소식이 빨리 알려졌고 3월 3일 이미 부산 일원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었다. 하지만 만세운동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부산은 일본인이 많이 살고 있었던 것만큼 경찰과 헌병대, 수비대가 있었기 때문에 쉽게 시위를 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다. 하지만 부산에는 대동청년단과 국권회복단 같은 비밀결사 독립운동단체들이 있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최천택은 유유진(兪有鎭) 김수홍(金守弘), 백용수(白龍水) 등과 만나 밀의를 거듭하면서 독립선언서를 대량 등사하여 각 사회단체에 배부하였다. 한편 같은 좌천동에 있는 일신여학교 학생들의 3월 11일 의거와 그 후 동료 여학생들의 여러 차례에 걸친 투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지원하였다.
3월 11일 오후(오전) 9시부터 일신여학교 학생들과 교사들은 좌천동 정공단 거리를 누비며 '대한독립 만세'를 목이 터지도록 외쳤다. 주민 100여 명도 합세하여 정공단 일대는 태극기의 물결로 넘쳤다. 부산 최초의 만세운동은 밤 11시까지 지속되었다. 여학생 전원과 교사 2명이 체포되었고, 정공단 주변은 일경의 경계가 강화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경성공업전문학교를 졸업한 부산진공립보통학교 교사 홍재문(洪在文, 1897~1958)이 학생 배수원(裵守元) 등과 여러 차례 독립 만세운동에 대한 회의를 한 후, 4월 3일을 기하여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의거하기로 하고, 또 민중의 독립정신을 함양하기 위하여 조선독립신문을 발행키로 하였다. 4월 3일 오후 2시 30분경, 그는 '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좌천동 거리에 세워두고, 4학년 학생을 이끌고 수백 명의 군중의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 만세를 선창하며 시위 운동을 벌였다. 정공단 일대에 독립 만세의 메아리가 울려 퍼졌다. 시위군중은 출동한 수비대 보병과 경무기관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