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 달 전쯤, 나는 작은 공모전에서 소설부문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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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쉬는 날이라 느지막이 일어나선 소파와 한 몸이 되어 뒹굴고 있을 때였다. 별생각 없이 티브이 리모컨을 들고 여기저기 돌려대다 말고 손을 멈췄다. 케이블 채널에서 <유 퀴즈 온 더 블럭>이라는 예능 프로의 재방송이 한창이었다. 마침 진행을 맡은 코미디언 유재석이 거리에서 만난 평범한 시민들을 향해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한 우물을 파는 것과 여러 우물을 파는 것 중 어떤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사람들의 대답은 저마다 달랐다. 두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당연히 한 우물을 파야 합니다! 그래야 성공하죠." 확신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요즘 시대에 한 우물만 파서는 비전이 없다고 단언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나 같이 일리가 있는 소리라 그 누구의 말이 옳다고 쉽게 판가름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사실 나로 말하자면, 한 우물을 이십 년 가까이 판 사람이다.
나는 대학에서 문예 창작을 전공했다. 그리고 '프로 응모러'라 나를 소개해도 될 만큼 나는 긴 세월 소설 공모전에 매달렸다. 대학 졸업 후에 학원 강사로 생계를 꾸려가면서도 매년 신춘문예의 소설부문 응모에 빠짐없이 도전했고, 또 매번 탈락의 쓴맛을 보았다. 그래서 매번 그해 신춘문예 당선작이 신문에 실리는 1월 1일이면 몸도 마음도 여지없이 욱신거려서 며칠을 내리 끙끙 앓곤 했다.
지금 내 노트북에 저장된 단편 소설은 어림잡아 육십에서 칠십 편 정도다. 보통 시중에 나와 있는 한 권의 소설집에 열 편 정도의 단편이 실린다고 계산하면 나는 대략 (아무도 읽어 주지 않는) 일곱 권의 책을 쓴 셈이다.
소설을 쓰다가 막히면 나는 기분전환 삼아 다른 장르의 글을 쓰기도 했다. 칠십 분 분량의 드라마 대본도 다섯 편이 넘게 썼고, 동화도 썼고, 희곡도 썼다. 서평도 영화 감상평도 에세이도 가리지 않았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가 된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벌어진 일이다.
하지만 서글프게도 재능이란 성실함과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내가 '한 우물'을 파서 얻은 결론이다. 나는 누구보다 성실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 기약 없는 희망 고문이 자꾸만 내 발목을 잡았다.
그리고 작년에 서른아홉 살이 되었을 때, 나는 결심했다. 딱 올해까지만 죽기 살기로 해보기로. 마흔이 되거든 어차피 읽어 줄 사람 없는 소설 따위는 다신 쓸 생각도 말고, 월급 받고 하는 일이나 잘하자고. 그런데…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2020년 12월 그러니까 석 달 전쯤, 나는 작은 공모전에서 소설부문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당선을 알리는 문자를 처음 받았을 땐 내 눈을 의심했다. 편집장으로부터 수상 소감과 책에 실릴 프로필 사진을 준비해달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했다. 한편으로는 '혹시 이거 사기 아니야?' 하는 의심이 끊임없이 들었다.
그리고 지난 1월, 내 수상작이 수록된 책이 발간되었다. 이제 창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작은 계간지긴 하지만 분명 내 사진이 실려 있고, '신인상 수상 작가'란 글자 옆에 내 이름도 떡하니 박혀 있었다. '오지랖 넓은 글쟁이가 되고 싶다'는 수상 소감 역시 한 지면을 차지했다. 가슴이 두근두근 하는 한편 맥이 탁 풀리면서 허탈해졌다.
다음 목표는 드라마 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