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실 어머니는 심장판막증을 진단받으셨다. 수술은 무려 9시간이 걸렸다. '수술실'과 '통제구역'이란 단어는 수 천 번도 더 읽었다.
이상구
그 병원에서 다시 검사해 봤지만 결과는 같았다. 어머니는 내심 수술 받지 않아도 되겠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눈치였다. 속히 수술을 해야 된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다른 도리는 없었다. 아이처럼 안 하면 안 되냐고 칭얼대듯 묻는 어머니께 주치의는 다소 강경했다. 어머니는 곧 체념하셨다.
7시간 정도 걸릴 것이란 수술은 예상보다 길어졌다. 수술 중간에 대기실로 나온 집도의께서 어머니 심장에서 제거했다는 판막 조각들을 보여주었다. 마치 시커멓게 죽은 손톱같았다. 저 작은 조각들이 한 사람의 목숨을 좌우한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오후 5시가 다 돼서야 어머니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당신은 그리로 옮겨지고도 한참동안 깨어나지 못하셨다. 하얗게 질린 얼굴과 잔뜩 불안한 표정을 한 채 억지로 잠이 든 당신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아렸다. 얼마나 무섭고 힘들었을까.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머니는 20분쯤 지난 후에야 눈을 뜨셨다. 그런데 나를 보시며 "누구세요? 여긴 어디죠?"라 대뜸 물으셨다.
너무 놀라 주저앉을 뻔 했다. 혹시라도 수술의 충격으로 정신줄 놓으신 건가, 했다. 하지만 간호사들께선 섬망 때문이니 안심하라고 일러주셨다. 연로하신 분들이 갑자기 환경이 바뀌거나 수술한 후 마취에서 깨어나며 흔히 보이는 증세라 했다. 그 말씀대로 어머니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셨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중환자실은 면회가 까다롭다. 15분씩 하루 두 번이다. 집에서 병원까지 왕복 네 시간이다. 그 많은 시간을 길에서 버릴 수는 없었다. 나는 옷가지며 침낭 따위를 싸들고 보호자 대기실의 옹색한 벤치에서 먹고 자며 간병했다. 어머니는 볼 때마다 집에 가라 성화셨지만 내심 기다리시는 것 같았다. 어쩌다 조금 늦게 들어가면 '안 오는 줄 알았다'며 안도하시곤 했다.
일반 병실로 옮기고 나선 또 어머니 친구 분이 보호자 역할을 해주셨다. 어머니도 나보다 그게 편하다 하셨다. 어느덧 퇴원이 임박했다. 생각해 보니 집에 아무도 없었다. 초기지만 뇌경색에 심장수술을 했고, 지독한 관절염으로 거동마저 불편하신 분을 혼자 둘 수는 없었다. 나라도 함께 있어야 했다. 어머니께선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하는 수 없이 그러자고 하셨다.
살던 오피스텔을 세놓고 세간살이는 모두 처분했다. 원룸살이라 그나마도 단출했다. 책도 웬만한 건 다 중고책방에 넘겼다.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는 양 가방 두어 개만 달랑 들고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짐은 그게 다냐, 어떻게 그러고 살았냐 물으셨다. 아버지께서 쓰시던 방에 짐을 풀고 본격적으로 어머니와의 한집살이를 시작했다. 실로 30년만의 해후였다.
그 날 저녁 어머니는 죽을 드시겠다고 하셨다. 동네 식당에서 포장된 죽을 사와 어머니와 마주 앉아 첫 식사를 했다. 썰렁한 집안에 덩그마니 늙은 모자가 앉아 밥을 먹는 풍경이 참 어색했다. 어머니는 식사 끝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난 이번에 널 다시 보게 됐다. 이런 사람인지 몰랐다." 그건 무슨 말씀일까. 내가 전엔 어떤 사람이었다는 걸까.
그건 이랬다. 당신 장남의 평소 행실로 봐선 발 벗고 나서 서울 큰 병원에 입원시켜주고, 한데서 자면서 간병하고, 집으로 들어와 보호자를 자청할 줄은 몰랐다는 거였다. 자식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내가 진짜 할 줄은 몰랐다는 거였다. 나는 그만큼 신뢰를 잃은 망나니 아들이었다. 아, 평화로운 공존의 전제는 신뢰인데, 우리 사이엔 그게 없는 거였다. 갑자기 앞이 막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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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한집살이를 시작했습니다, 30년만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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