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작구 일대 주택 모습.
유성호
5단지에서 살 때는 엘리베이터 없는 5층 건물의 하필 5층 집이라 출퇴근 때마다 아침저녁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이 늘 고역이었다. 집은 방과 부엌, 화장실이 각각 하나씩 딸린 11평짜리 분리형 원룸 구조였는데, 보증금 4천5백만 원에 월세가 15만 원이었다. 하이힐은 엄두도 낼 수 없던 시절이었지만 직장까지 30분도 채 걸리지 않는 데다 월세가 저렴해서 사는 동안 큰 불만은 없었다.
그다음 이사를 간 11단지의 집은 18평 남짓한 크기에 방이 두 개였는데, 전세 보증금이 1억 2천이었다. 다달이 빠져나가는 월세를 줄여서 돈을 모아보고자 무리를 해서 얻은 집이었다. 물론 '부모님 찬스'가 없었다면 어려웠을 일이다.
자취 생활 시작 후 투룸은 처음이라 작은 방을 드레스룸으로 꾸며 놓으니 들여다볼 때마다 신바람이 났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지은 지 삼십 년도 더 된 낡은 임대 아파트만 골라서 이사 다니는 젊은 여자가 극히 드물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
사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서울에 직장을 둔 젊은 여자는 주로 화이트 풍의 세련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널찍한 오피스텔이나 고층 아파트에서 혼자 산다. 호러물이 아닌 다음에야 엘리베이터도 없는 낡은 임대 아파트에 사는 주인공을 본 적이 없다.
화면 속 그녀들은 아침이면 커다란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잠에서 깨고, (창문이 큰 남향집은 비싸다) 깨끗하고 환한 부엌에서 (깨끗하고 환한 부엌도 비싸다) 갓 내린 향긋한 원두커피를 마신 후 집 앞 10분 거리에 있는 한강 변을 힘차게 달리며 (한강 변, 당연히 비싸다) 하루를 시작한다.
드라마나 영화가 아니라 <온 앤 오프>나 <나 혼자 산다>와 같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봐도 마찬가지다. 그녀들의 '평범한 삶'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절로 자괴감이 든다. 지금 나는 세상이 요구하는 그 '평범한 삶'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 걸까?
재작년에 나는 지금 사는 중랑구로 이사를 왔다. 전세 계약이 끝나갈 즈음 직장을 송파구 쪽으로 옮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경기도에 있는 본가에서 너무 멀어지지 않으면서도 직장과 조금 더 가까워지는 동네를 물색하다 보니 맞춤인 곳이 바로 여기였다. 서울치고 비교적 전세가가 저렴하다는 점도 선택의 이유 중 하나였다.
나는 발품을 팔며 몇 군데의 부동산을 돌아다닌 끝에 내가 원하던 조건에 딱 맞는 집을 발견했다. 지하철역까지 도보로 8분이 채 안 걸리는 신축 빌라의 5층이었다. 당연히 아직 비닐도 뜯지 않은 새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대로변에 위치해서 귀가 동선이 안전하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전에 살던 집보다 훨씬 좁으면서도 보증금이 6천만 원이나 더 비쌌지만, 나는 적금을 깨고 대출을 받아서 기어이 이사를 강행했다. 무엇보다 나도 한 번쯤은 친구들이 아무 때나 들이닥쳐도 부끄럽지 않을 깨끗하고 예쁜 '새집'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욕심이 컸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덧 2년이 지나 재계약 시기가 돌아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다시 이사를 준비 중이다. 출퇴근 편도 50분 거리를 40분 이내로 단축시키는 것이 이번 이사의 최종 목표이다. 또 '최소 15평 이상, 큰길 가까운 위치, 다용도실이 딸린 투룸 빌라나 혹은 다가구 주택, 가격은 최대 2억까지'가 내가 다음에 살고 싶은 집의 구체적 스펙이다.
그런데 내가 원한 스펙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이었는지를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부동산 앱을 켜고 '투룸 빌라 전세'에 들어가 매물 두어 군데만 클릭해보아도 서울시의 10평 남짓한 방 두 칸짜리 빌라 전세가가 '최소 2억 원 이상'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요 며칠 온종일 앱을 들여다보아도 마음에 드는 집을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내부가 깨끗하면 외관이 너무 지저분하고, 외관이 그럴싸하면 주변이 너무 외져서 늦은 시간에 퇴근하는 나로서는 도무지 감당할 자신이 없다. 그나마 봐줄 만하다 싶어 전화를 걸면 집주인이 전세자금 대출을 원치 않는단다. 결국, 최소 2억 5천은 손에 쥐고 있어야 내가 원하는 조건의 집들을 몇 군데나마 찜해 놓고 골라볼 수 있다는 얘기다.
2년 전 나는 영혼을 끌어모아야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