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 3일 주간 내각회의에 참석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연합뉴스=AP
메르켈 정권에서도 총리 자신에게는 큰 탈은 없었으나 기민당/기사당 연합 소속 의원들의 끊임없는 추문이 이어졌다. 특히 의원들이 기업의 이익을 도모하는 로비 활동을 벌인 사건이 이어져 결국 로비금지법 제정이 추진 중에 있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이제 메르켈이 물러나면서 후계자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지만, 과연 기민당/기사당 연합이 과연 차기 정권을 잡을지 아무도 모를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최근 <슈피겔>지(Spiegel)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연방 차원의 기민당/기사당 연합의 지지율은 27.5%에 머물렀다. 연정 파트너인 사민당은 더 처참하다. 16.7%이다. 그에 비하여 이제는 좌파 대안 정당이 아니라 수권 정당으로 떠오르고 있는 녹색당은 20.7%로 당당히 제2정당의 지위에 오르고 있다. 전통적인 자민당은 8.7% 좌파당은 8.4%이다. 그리고 극우 정당인 독일을위한대안당은 12.6%에 달한다.
전통적으로 독일 정치를 이끌어온 기민당/기사당 연합과 사민당은 이제 더 이상 다수당이 아니다. 우연히 이는 기민당/기사당 연합의 굳건한 지지 기반이었던 독일 가톨릭 교회의 신자 비율의 추세와 비슷하다. 1961년 조사 때만 해도 독일 국민의 45.5%가 가톨릭, 51.1%가 개신교였다. 둘을 합치면 96%가 넘어 사실 거의 모든 독일 국민이 기독교 신자였다.
그러나 2019년 기준, 가톨릭은 27% 개신교는 26%로 추락했다. 두 교회 모두 상징적인 30% 마지노선이 무너졌다. 교회 탈퇴의 속도는 가속화되고 있다. 해마다 개신교와 가톨릭을 합쳐 50만 명 이상이 기독교를 떠나는 중이다. 조만간 50% 선도 붕괴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보수의 근본 지지 세력인 기독교의 붕괴가 보수 정당의 붕괴에 커다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다.
1949년 독일 제1차 총선에서는 기민당/기사당 연합이 31% 사민당이 29.2%로 절대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한 추세는 통일 이후에도 이어졌다. 이런 추세는 녹색당이 처음으로 원내에 진출한 1980년대에도 큰 변화가 없었다. 2017년 총선에서 극우정당인 독일을위한대안당이 12.7%의 득표율을 보이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 총선에서 기민당/기사당 연합은 32.9% 사민당은 20.5%의 지지만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연방 차원에서 대연정을 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이후 전통적인 두 정당의 지지율은 더욱 떨어지는 추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 근본문제가 바로 무능과 부패이다. 너무 오랫동안 권력을 누려온 타성에 젖어 개혁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사이에 의제를 녹색당이나 독일을위한대안당에 빼앗겨 온 결과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 독일 정부가 한국의 안기부와 비슷한 정보기관의 기능을 하는 부서인 연방헌법수호청(Bundesamt für Verfassungsschutz; BfV)을 통하여 독일을위한대안당의 불법 행위에 대한 조사에 들어간 것도 예사롭지는 않아 보인다. 보수 정당을 살리기 위해서는 극우 세력의 지지라도 다시 끌어들여야 할 판이 된 것이다.
정부의 무능에 대하여 독일 국민의 선택이 녹색당일 수밖에 없는 것은 독일 정국의 현실을 볼 때 필연적이다. 기업을 대변하는 자민당은 국민들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고 극좌 극우 정당인 좌파당과 독일을위한대안당은 독일 국민의 대다수인 중도 층에게 대안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방선거에서도 녹색당은 현재 눈부신 도약을 하고 있는 중이다. 1980년 1.5%의 득표율로 시작한 녹색당이 이제 당당한 수권 정당으로 성장한 배경에는 환경보호라는 의제 선점에 성공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보수 정당의 무능과 부패가 더 큰 원인일 것이다.
마스크 스캔들, 어디까지 갈까... 총선 패배 가능성도 커져
기민당 원내총무인 치미아크(Paul Ziemiak)는 이번 마스크 스캔들이 1990년의 정당 후원금 스캔들 이후 최대의 위기라고 진단했다. 당장 발등의 불이 된 지방선거만이 아니라 9월 총선도 전망이 매우 불투명해졌다는 것이다. 이제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와 라인란트-팔츠 주의 지방선거에서 기민당/기사당 연합이 패배하여 총선에서도 패배할 가능성이 매우 농후해진 것이다.
사실 기민당/기사당 연합의 지지 세력의 상당수가 극우 보수 진영이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들의 지지를 믿고 그동안 안온하게 대처해오다가 2017년 총선에서 독일을위한대안당으로 당내의 극우 세력이 떨어져 나가면서 그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사민당도 마찬가지이다. 2007년 슈뢰더의 신자유주의 경향에 염증을 느낀 사민당 내의 좌파 진영이 떨어져 나가 구동독의 공산당의 후예인 민사당(PDS)와 연합하여 좌파당을 수립하면서 사민당도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2005년 선거에서 34.2%의 지지율을 보였던 사민당이 2009년 선거에서 무려 11.2%가 폭락한 23.0%의 지지율만 확보한 것이다. 그 이후 30%는 꿈의 숫자가 되어버렸다. 기득권에 안주하며 무능과 부패를 지속하면서 기득권 유지에 골몰하는 기성 정당의 말로를 현재 독일의 양대 정당이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독일 국민에게 다행스러운 것은, 의원내각제답게 기성 정당들이 부패할 경우 선택할 대안 정당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정당사에서 기민당/기사당 연합이 중심이 되어 사민당이나 자민당과의 연정으로 버텨온 보수 정권을 이제는 녹색당이 캐스팅보트를 행사하며 진보 세력만의 정부 구성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미 슈뢰더 정권 때 녹색당은 사민당과의 연정으로 정권에 참여해 본 경험도 있다. 실제로 베를린의 경우는 아예 사민당 좌파당 녹색당의 이른바 적적록 연정이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녹색당이 주정부 차원에서 정권에 참여하는 경우가 현재 독일에서 11개에 이르고 있다. 기민당의 경우 10개이다. 전세가 역전된 것이다. 사민당은 13개 주에서 연정에 참여하고 있다. 철저한 지방자치제를 바탕으로 연방국가인 독일에서 이는 정치의 흐름이 보수에서 진보로 나간다는 분명한 징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유럽 최강 국가인 독일의 정치적 변화가, 유럽 대륙은 물론 세계의 진보 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지켜볼 일이다.
녹색당은 1983년 제10대 독일 총선에서 27석 의석을 차지하며 혜성같이 등장한 정당이다. 당시 정권을 주고받던 기만당/기사당 연합과 사민당의 구태 의연한 정치에 염증을 느낀 독일 국민들의 숨통을 터주었다. 또한 무엇보다도 녹색당은 초미의 관심사였던 환경 문제를 당의 최대 어젠다로 들고 나와 이 문제에 관한 한 다른 정당에 크게 앞서게 됐다.
그리고 이들의 인기가 일시적 현상에 불과할 것이라는 기성 정당의 예상과는 달리, 1994년 이후 안정적인 지지세를 확보하여 왔고 이제는 그 세력을 늘려가며 수권 정당의 면모를 가다듬고 있는 중이다. 이제 마침내 독일 국민들이 안심하고 녹색당을 대안으로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재 어지러운 한국의 정치판을 보면서 독일과 같은 대안이 없는 상황이 더욱 안타깝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현재 대선 후보 지지도에서 크게 앞서 선두를 달리는 윤석열이 국민의힘으로 가지 않고 제3의 대안으로 등장할지 더욱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만약 윤석열이 한국에서 독일의 녹색당과 같이 기성 정당의 부패와 무능을 지적하고 정치적 어젠다를 선점할 수만 있다면, 가능성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에서 내년 3월에 치러질 대선이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사실 현재 한국에서도 여야를 막론하고 기성정치에 대한 염증이 최고조에 달해 있다. 사실 독일 녹색당이 등장할 때 독일 정국도 마찬가지였다. 타성에 젖은 여당인 기민당/기사당 연합은 물론 만성 야당 의식의 사민당도 정권 획득에만 골몰할 뿐, 국민의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데 실패하고 있었다.
그럴 때 등장한 녹색당과 환경 보호 이슈는 이른바 정치염증(Politikverdrossenheit)을 느낀 독일 국민들에게 감로수와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윤석열이든 이재명이든, 그 이외의 누구든 한국 정치계에도 새바람이 불기를 바란다. 개인과 집단의 이해타산에만 골몰하며 기득권에 안주하는 구태의연한 직업 정치가들을 혁파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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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보수당 몰락의 교훈, 정치염증 없앨 새 인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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