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평도 폭풍피해 판명’ 제하의 ‘동아일보’ 호외(1934년 6월 4일)
동아일보
위는 '연평도 폭풍피해 현황'을 전하는 1934년 6월 4일 치 <동아일보> 호외다. 호외는 '5백 생명(五百 生命)이 조난(遭難) 당하는 등 피해가 의외로 심대(甚大)하다'고 전하고 있다.
신문 기사에 따르면 1일 저녁, 모내기철 앞두고 내린 단비가 다음날 새벽 폭풍으로 돌변, 가옥과 창고건물이 파손되고 1천여 명의 조난자가 발생하는 등 황금어장은 끔찍한 참사로 뒤덮였다.
연평도는 일제강점기에도 파시 때면 운집한 어선들로 해안가는 장관을 연출하였다. 조선 팔도는 물론 일본의 장기(長崎), 웅본(熊本), 좌하(佐賀), 복강(福岡) 등지에서 1천여 척의 어선이 몰려들었다. 그해에도 제1회 조(4월 27일~5월 3일)와 2회 조(5월 9일~18일)에 30여만 원의 어획고를 올리는 등 1백만 원 돌파를 전망하고 있다가 엄청난 변을 당했던 것.
군산에서도 만선의 꿈을 안고 출어했던 어부들이 익사하거나 실종되는 등 피해가 컸다. 이는 미증유의 해상 조난 사고로 신문은 "연평도에서 침몰한 어선은 군산부 동빈정(東濱町) 임겸상회 군산냉장고(林兼商會 群山冷藏庫) 경영의 조기잡이 배로 판명됐다"며 "군산에서 떠난 배 척수는 314척(파손 200여 척)이고 그 배에 탄 어부들은 1천500명"이라 전하였다.
조난당한 군산 어선 300여 척은 사고 20여 일 전 군산을 떠나 칠산 앞바다에 들러 조업하고, 북상하는 조기떼 따라 연평도 근해까지 진출했다고 한다. 조난당한 시간은 2일 오후 6시경으로 추측되며 생존자 450여 명(1천여 명은 행방불명)은 연평도에 수용 구조 중이나 식량 결핍으로 수난을 당하고 있다고 신문은 보도하였다.
구천을 떠도는 혼들 넋 위로하는 추모제 지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