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20일 서울 서초구 내곡동 국가정보원에서 열린 국회 정보위원회의 국정원 국정감사에 앞서 국정원 관계자들이 정보위 소속 의원들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1. 신원조사의 현실적 문제점
지난 3월 4일자 글
'[주장] 국정원의 공무원 신원조사, 위법이니 폐지해야'(아래 '3월 4일자 글')에서, 국정원의 신원조사는 법률의 근거와 구체적·명시적 위임 없이, 공무원의 공무담임권과 일반적 행동자유권을 침해하고 민간인의 직업선택의 자유와 거주·이전의 자유를 침해하여, 헌법에 위반되고 위법하다고 서술했다.
신원조사에는 위와 같은 위헌·위법이라는 문제점 외에 현실적으로도 다수의 문제가 있는데, 몇가지만 보면 다음과 같다.
가. 신원진술서를 기초로 국정원의 존안자료가 작성된다
첫째, 신원진술서를 기초로 국정원의 존안자료가 작성되는 것으로 보인다. <한겨레> 1997년 3월 17일 '안기부 대해부 4 존안카드' 제목의 기사에는 '공무원은 임용 순간부터 존안자료 기록이 시작된다'는 내용이 있다. 이것이 3월 4일자 글에서 본 바와 같이 공무원이 임용되기 직전에 '신원진술서'를 작성·제출해 '신원조사'를 받아야 하는 내용에 정확히 부합한다. 즉, 국정원이 신원조사를 위해 신원진술서를 작성·제출받는 순간부터 존안자료 작성이 시작되는 것으로 보인다. 신원진술서의 항목과 국정원 존안자료의 항목은 상당히 유사할 것으로 보인다.
존안자료 관련 <한겨레> 1997. 3. 17. 기사
안기부가 각계 인사의 인물 정보를 수집하고 관리하는 것은 알려진 비밀이다. 존안자료로 불리는 이 인물 정보는 엄밀히 말하면 사찰의 결과물이다. 안기부 전직 실장급 간부는 "존안자료야말로 안기부가 가진 힘의 실질적 원천이다"고 말한다. 안기부는 10만명 이상의 존안자료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일단 사무관급 이상 행정 사법 입법 공무원은 임용 순간부터 기록이 시작된다. 이 밖에 △ 대학의 조교수 이상 △ 국영기업체 및 대기업 임원급 △ 언론사의 차장 이상 및 주요 부서 기자 △ 주요 종교기관의 성직자 △ 학원 재야 시민운동단체의 간부 등은 안기부에 자신의 존안카드가 만들어져 관리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존안자료는 우선 이름, 생년월일, 본적, 주소, 교우관계 등 기초적인 사항부터 시작된다. 일단 카드가 만들어지면 요원들이 세월을 두고 접촉하면서 확인한 각종 견문·정보·첩보의 내용이 차곡차곡 쌓여 간다. 안기부원에 따르면 이렇게 축적된 존안자료가 A4 종이로 1백쪽 분량이 넘는 사람이 수둑룩하다고 한다.
고위직으로 갈수록 존안카드는 어느새 '살생부'로 둔갑하게 되고 그 '살생부'를 작성하는 안기부원은 염라대왕 같은 존재일 수 밖에 없다. 수십년간 자기도 모르게 차곡차곡 쌍인 자료가 어느날 갑자기 자신의 심장을 겨누는 '비수'로 다가올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나. 국정원의 공무원에 대한 영향력 행사 수단이 된다
둘째, 신원진술서를 기초로 작성·업데이트된 존안자료 내용을 토대로 국정원이 공무원(판사·검사·행정부·국회공무원 등 포함)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몇 가지 사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① '논두렁 시계' 관련 검찰 수사
MBC 뉴스는 2019년 9월 3일 <"논두렁 소설은 국정원 작품"... 이인규 입을 열다>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논두렁 시계' 수사 관련 MBC 2019. 9. 3. 보도내용
- [이인규/전 대검 중수부장]
"국정원 IO(정보관)라는데 어쨌든 두 사람이 왔더라고요. 국정원 명함을 내밀더라고요. 그래서 야단을 쳐서 돌려보내고 바로 (검찰)총장에게 보고하고."
- 기자 : 국정원의 제안을 거절한 다음 언론에 '명품시계' 보도가 나갔으니 국정원이 직접 언론에 흘렸을 거라는 주장입니다. 이 전 부장은 논두렁이라는 단어는 검찰 조사 때 나오지 않았다고 강조했습니다.
(중략) 전직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 간 망신주기 수사와 언론 플레이 사건은 10년 넘게 미궁에 빠져 있습니다.
뉴시스, 중앙일보, 채널A 등은 2020년 1월 14일 다음과 같은 취지로 보도하였다.
'논두렁 시계' 수사 관련 뉴시스 등 2020. 1. 14. 보도내용 정리
- 이인규 변호사는 '논두렁 시계 보도에 국정원이 관여했다'는 취지의 진술서를 서울중앙지검에 3차례 제출했다고 한다.
- 이인규 변호사는 "검찰이 빨리 결과를 내지 않아 신속히 진행하라는 차원에서 서면 진술서를 냈다"며 "검찰에서 조사를 받으라고 요청한 적이 없고, 직접 진술서를 낸 것"이라고 발언하였다.
- 이인규 전 대검 중수부장은 검찰이 대면 조사를 요구한다면 적극 응하겠다고도 밝혔다.
검찰이 위 사건을 계속 수사하면 결국에는 국정원이 곤란해질 것이고, 따라서 위 수사가 진행되지 않는 것에는 국정원이 가장 큰 이익을 본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서울중앙지검이 수사를 진행하지 않는 것은 검찰에 대한 국정원의 존안자료와 관계 있는 것으로 보인다.
② 국정원 프락치 사건
<머니투데이>는 2019년 8월 27일 국정원 프락치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도했다.
국정원 프락치 관련 머니투데이 2019. 8. 27. 보도내용 정리
- 국정원 사무실에 가서 진술서를 쓸 때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고지받았다'는 내용이 있기에, 한번은 "변호인 불러도 되느냐"고 물어봤더니 "죽여버리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 정권이 바뀐 뒤 김대표가 "일 그만둬야 하지 않냐"고 묻자, 국정원 직원이 "우리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도 버틴 조직이다. 정권이 바뀌어도 우리 할 일은 한다"고 말했다.
위와 같이 국정원이 프락치를 통해 사찰을 감행한 것, 변호인을 부르면 '죽여버리겠다'고 한 것, 정권이 바뀌어도 상관없다고 한 것은 국정원 자신들이 어떠한 불법을 저질러도 기소되지 않거나 기소되더라도 무죄 또는 가벼운 처벌만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에 가능했다고 보인다. 이것은 국정원이 법원·검찰 등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이 전제돼 있다고 할 것이다.
③ 조작간첩 사건
<문재인의 운명>에는 '조작간첩 사건' 제목 하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87〜90면, 324면).
<문재인의 운명> 중 조작간첩 관련 내용 정리
-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사건은 '신씨 일가 간첩단' 재심청구 사건이다. 내가 이 사건을 처음 재심 청구한 것은 94년 11월이었다.
- 그리고 드디어 2009년 8월 무죄판결을 받았다. 간첩으로 유죄판결 받은 지 거의 30년만이었고, 처음 재심청구를 한지 15년만의 일이었다.
- 사건을 조작해 새파란 젊은이들을 잡아가뒀다. 늙어 백발이 될 때까지 감옥에서 인생을 썩게 했다.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들 삶까지 파탄으로 몰았다. 간첩의 가족이라고 공직은커녕 취업도 못하게 했다. 주변에선 손가락질 당하고 한 집안 전체를 풍비박산으로 만든 잘못이 다름 아닌 국가에 의해 자행됐다.
<프레시안> 서어리 기자가 쓴 <나는 간첩이 아닙니다>(한울, 2016)에는 유우성 사건을 비롯해 1970년부터 2016년까지의 간첩조작 사례 여덟 건이 자세히 소개돼 있다. 저자는 국정원(중정, 안기부)을 '간첩공장'으로 표현하고 있다.
국정원이 다수의 간첩 사건을 조작하여 대법원까지 유죄판결을 받아내는 과정에서 판사·검사 등에 대한 존안자료가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검찰과 법원이 다른 사건과 같은 기준·시각으로 간첩 사건을 처리했다면 다수의 간첩 조작 사건이 발생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본다.
다. 공무원·민간인에 대한 사찰의 근거자료
셋째, 존안자료가 공무원·민간인에 대한 사찰의 근거가 될 수 있다. KBS '시사직격'은 올해 1월 22일 '국정원 존안자료의 실체' 제목으로, 국정원이 곽노현·문성근·명진스님 등 다수의 인사를 사찰했다고 보도했다. 이와 같이 신원진술서를 기초로 작성된 존안자료가 공무원과 민간인을 사찰하는 데 악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전 대구 CBS 김태우 기자가 쓴 <국정원 IO의 달콤한 유혹>(지식중심, 2018)에는 존안자료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30∼31면).
<국정원 IO의 달콤한 유혹> 중 존안자료 관련 내용
존안자료로 불리는 이 인물자료는 일종의 사찰 결과물이다. 존안자료로 불리는 인물자료에는 개인과 가족 인적사항은 물론 접촉 인물과 사생활, 비위 사실 등 40여 개 사찰항목이 촘촘하게 기록돼 있다. 만약 사찰 당한 당사자가 봤다면 어땠을까? 마치 조지오웰이 쓴 소설 <<1984년>>에서 독재자 빅브라더가 집집마다 방마다 거리마다 작업장마다 설치된 텔레스크린을 통해 모든 국민을 감시하는 것과 같은 전율을 느꼈을 것이다. 인격살인에 가까운 내용을 담고 있어서 사찰 항목과 내용 일부만 문건 그대로 인용한다.
현재도 사찰이 계속될 수 있는데, 사찰이 계속되는지 여부를 국정원 외부에서는 알기 어려운 상황이다. 박지원 국정원장 인사청문회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국정원장조차도 직원들이 특수활동비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잘 모르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