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경전차부산에 운행되었던 초창기 협궤 경전차(1910~1930년)
부산근대역사관
박재혁, 다시 중국으로 가다
박재혁은 전차자장을 그만두고 다시 경북 왜관의 박국선과 함께 곡물상을 운영하였다. 1916년 겨울 박재혁은 부산을 떠났다. 모친에게도 알리지 않고 갔다. 알렸다면 분명 말렸기 때문이다. 다만 오택에게 알리고 모친과 여동생을 돌봐줄 것을 부탁했다. 그때 박재혁은 박국선의 자금 700원을 가져갔다. 중국으로 간 이유는 미국으로 가기 위한 어학 공부때문이었다. 1917년 7월의 상해 영사경찰서 기록에 따르면, 경상남도 부산부 범일동 183번지에 사는 박재혁(朴載赫. 23세)은 1916년 말 어학연구 목적으로 무단가출하여 안동현을 거처 상해로 들어와 중화국청년회관(中華國靑年會館)에서 입학 중이었다. 고향에 있는 실부(實父)가 상해영사경찰서에 보호와 방출을 원해 박재혁에게 1917년 7월 귀향하기를 설득한다. 상해 체류 중에 반일적인 발언은 하지 않은 듯하다. 실부는 아마 박국선일 가능성이 높다. 자기 돈을 가져간 박재혁을 귀국시켜 돈을 받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1920년 부산경찰서 조사에는, 1917년 6월에 박재혁은 곡물상 주인을 달래어 704원을 얻어 상해로 건너갔다. 상해 경찰조사에 따르면 그는 당시 상해에 체류하고 있는 중이었다. 박재혁은 무언가를 숨기기 위해 경찰조사에 거짓으로 답한 것이 분명하다.
박재혁, 김인태, 오택은 미국에 가고자 하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것을 위해 김인태와 박재혁은 중국에서 영어 공부를 하였다. 오택은 인삼, 고추, 마늘, 명태, 해초 등을 수출하고 그 대금으로 잡화를 수입하는 '조선명물공사'를 만들었다. 미국 교포가 상인이 아니라 1년에 2번 정도 교역하여 여권을 청구할 상황이 아니라 상해에 있는 박재혁과 김인태에게 먼저 미국으로 출발하라고 하였다. 김인태는 1915년부터 2년간 상해 동제대학(同濟大學)에서 수학하였다. 그 후 중국 당국으로부터 여권을 발급 받아 유럽 경유 미국으로 건너갈 생각이었다.
당시 여권을 받기는 쉽지 않았다.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유학하는 경우는 아무런 여권이나 여행비자도 없는 무국적자의 신분으로 떠나야 했기 때문에 상당한 험로를 밟아야 했다. 때문에 이들은 중국으로 건너가 해로(海路)를 택하거나 아니면 만주와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긴 여정의 육로(陸路)를 택해야 했다. 여권이나 비자도 없이 무작정 떠나는 경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미국행 배에 빈자리가 날 때까지 약 10개월을 상해에서 체류해야 하거나 빈자리가 나도 겨우 사정해서 타야 했고 미국에 도착했어도 불법이민자로 분류되었다. 그렇지만 1918년까지 미국의 경우에는 불법입국자인 한인 유학생들에게 '정치망명유학생'이라는 신분으로 입국을 허가해 주었다.
하지만 일본 유학에 비해 구미유학은 쉽지 않았다. 친일파 양성을 위한 일본유학생은 1910년대 매년 500~700명에 달했으나 일본 이외 유학생은 총 57명에 불과했다. 구미유학을 막기 위해 일제는 상해주재 영사를 통해 미국 배편을 기다리는 한국인을 체포했다. 이를 피하기 위해 만주를 거쳐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험로를 경유해야했고 때론 망명자 신분으로 신변보호에 어려움이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어려움은 유학경비였다.
1917년 상해에 머물던 박재혁이 오택에게 편지를 보냈다.
"오형, 잘있었는가? 다름이 아니라 내가 참 난처한 입장에 빠졌네. 미국갈 준비가 다되어 승선 전 석별연 겸 주선자에게 접대한다고 상해 요정에서 만찬회를 하였다네. 도미의 꿈이 실현되어 참 기분이 좋았다네. 그런데 그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다네. 여권과 배표, 현금 등을 넣은 양복 상의를 병풍에 걸어두었는데 그것이 문제였네. 수시간 먹고 난 뒤 계산을 하려고 양복을 뒤져보니 아뿔싸. 돈이 없어졌는 것을 알았네. 요정에는 내일 지불한다고 하였지만 난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네. 수년간 기다려왔던 미국행이 좌절되고 나니 앞이 캄캄했다네. 밤새 생각해보아도 갈 곳은 황포강뿐이었네, 다음날 유람선을 탔는데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더군. 모친과 여동생이 보고 싶더군, 하지만 꿈이 무너졌는데 살아서 무얼하겠나 생각하고 강에 몸을 던졌다네. 그런데 아직은 죽을때가 아닌 모양인지 지나가던 석탄운반선 인부에 구조되어 동재병원에 입원했었다네. 자네에게 늘 신세만 지고 미안한 마음 금할 수 없네. 이번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도와주시게. 자살도 여의치 않아 부득이 남양 등지로 가서 유랑하다가 필리핀에서 미국행 배를 타려고 하네. 그러니 인삼을 보내주었으면 좋겠네. 모친과 여동생에게 내가 무사하다고 꼭 전해주시게. 이만 총총."
오택은 박재혁의 편지를 받고 안타까움을 그대로 느꼈다. 편지를 받자 말자 먼저 박재혁의 모친을 방문히여 중국에서 별탈없이 잘 지내고 있다고 안심시켰다. 그리고 박명진에게 용돈을 손에 꼭 쥐어주었다. 오택은 인삼 10근을 보내주었다.
박재혁은 인삼 일부를 팔아 홍콩를 경유하여 싱가포르에서 미쓰이 물산(三井物産)지점에 취직 기회를 보고 있다가 필리핀 출장소로 전근하였다. 미쓰이 물산은 대한제국 때 1900년부터 8년 동안 관삼위탁판매계약을 맺었고, 황실은 재정수입의 증대를 기하였지만 직접 생산자와 민중의 궁핍이 심화되었다. 1903년 4월 대한제국은 미쓰이물산을 통해 3400톤급 군함 양무호(揚武號)을 구입하였다. 1909년 삼정물산경성지점은 면포‧기계‧ 밀가루‧설탕‧석탄‧미곡 기타 내외 물산의 무역 및 조선의 명산인 인삼특약판매를 하였다. 당시 박재혁은 아마 곡물상보다 인삼, 잡화 등의 무역상으로 물품을 거래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1917년 최천택은 만주 훈춘에서 구 한국군을 거느리고 무장투쟁을 하고 있다는 황병길과 제휴하기 위해, 1917년 김병태과 장지형을 북간도로 밀파했다. 황병길은 1919년 3월 이후 본격적으로 무장투쟁을 하였다. 김인태는 상해에서 전차 차장 감독을 하며 김원봉과 의열단을 추진하며 때를 기다렸다. 오택은 무역 실적을 올려 정식 여권을 얻으려고 노력하였다.
사업가로 활동한 김정훈
김정훈은 1917년 4월 부산일보에 부산의 10대 명사에 선정되었다. 고려상회와 해륙물산무역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는 1916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을 하였다. 1916년 6월 부산 초량동에 인쇄와 서적 출판을 목적으로 한 자본금 5만원의 경남인쇄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경남인쇄(주)는 부산 지역에 설립된 최초의 한국인 제조업체였다. 주주는 양산의 전석준(全錫準), 부산의 이규정(李圭正), 김해의 허발(許撥), 부산의 오영식(吳爃植), 양산의 김정훈(金正勳), 부산의 박기필(朴淇弼)이었다. 초대 사장은 전석준이었다. 1917년 7월에 『태자잡지(泰自雜誌)』를 신청하였는데, 잡지발간 취지는 정치 실업을 주장으로 하여 조선 청년으로 하여금 문명을 촉진케하고 사회에 자기 수완을 발휘하여 입신출세에 헌신핳 목적이었다. 잡지 발간 여부는 알 수 없다. 1917년 8월 김정훈은 취체역(取締役, 사장)에, 윤현진의 형 윤현태는 감사에 취임한다. 1918년 12월 김정훈은 취체역에서 사임한다. 나중에 경남인쇄의 주주와 주주 수는 백산무역회사[117주], 전석준(全錫準)[100주], 백산상회[91주], 윤현태[90주], 박석권[60주], 허발[59주], 이청[50주], 윤병준(尹炳準)[50주], 엄정섭[50주]이었다.
김정훈은 1917년 12월 그는 합자화사 백산상회 설립에 동참한다. 당시 무한책임사원은 안희제(安熙濟, 의령, 28350원)·윤현태(尹顯泰, 양산, 28350원)·최완(崔浣, 경주, 1만원)이었고, 유한책임사원은 최준(崔俊, 경주, 2만원)·허걸(許杰, 동래, 11500원)·성태영(成泰永, 함안, 9200원)‧윤병호(尹炳浩, 남해, 5천원), 김정훈(양산, 4600원), 이정화(李楨和, 창녕, 4600원)·유덕섭(柳德燮, 양산, 4600원)·안담(安湛, 의령, 4600원)·정순모(鄭舜模, 양산, 4600원)·김용조(金容祚, 동래, 4600원) 13명이 자본금 14만원으로 회사를 설립하였다. 1917년 5월에는 양산지방금융조합 설립에 참여한다. 조합장은 전석준, 이사 소산선호(小山善浩), 감사 최상흡(崔商翕), 유덕섭(柳德燮), 김정훈이었다. 또 그는 연초경작도 양산 상삼마을에서 하였다.
백상상회와 경남인쇄 등은 민족 사업가들의 활동이다. 일제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민족자본을 육성하여 그 이익으로 민족 독립운동에 보태는 일이었을 것이다. 당시 사업을 하는 것은 개인적 이익과 국권회복 자금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리고 무역상회와 상점은 바로 독립 군자금을 보내는 비밀 거점으로 이용되었다. 안희제의 백상상회(무역), 박상진의 성덕태상점 등이 그러했다.
1917년 12월 부산 북빈(북항) 대창정에 있었던 고려상회는 개인 경영체제에서 3~4명의 공동 경영으로 바꾸며 자본금을 2만원으로 하였다. 공동인수한 사람은 김철수의 매형이자 엄주태의 장인인 박인표(朴仁杓), 훗날 한글학자로 조선민족혁명당에서 활동한 김두봉(金枓奉, 1889~1960), 최태현(崔泰鉉), 김진원(金晉源)이었다. 1921년 고려상회는 박인표가 사망하자 아들 박영출에게 상속된다. 지배인은 양산의 김철수였다.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울산・양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질문의 산물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를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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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경찰서 투탄 순국 100주년] 의열단원 박재혁과 그 친구들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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