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보름 상차림.시골살이 20여년 만에 처음으로 나 혼자 대보름 음식을 만들었다. 동네 사람들과 마을 회관에 모여서 나물을 지지고 볶아서 수다를 버무려서 먹던 시간이 그립다.
오창경
그 시절에는 논두렁의 풀을 자라는 대로 베어다가 소여물로 주기도 하고 발효시켜 거름으로 쓰던 시절이라 논두렁에는 자라다 만 잡초뿐이었다. 쥐불놀이를 하다가 불티가 튀어도 큰불로 번질 만한 풀이 없었다.
논에서 이어진 산에도 나무들이 거의 없는 민둥산이어서 발화가 될 만한 낙엽조차 귀할 때였다. 산불에 대한 인식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대보름을 시점으로 논두렁마다 들불이 타오르고 흥겨운 풍장소리가 마을 고샅에 울려퍼지면 동네 친구들과 온 마을을 보름달처럼 둥실둥실 뛰어다니던 정겨운 시절이 있었다.
"배고픈 시절이었잖여. 그날만큼은 맘껏 먹으라고 집집마다 오곡밥을 한 양푼씩 해서 부뚜막에 놔둔 거지. 저녁에 어느 집 사랑방에 모여서 윷놀이 하고 놀다가 누구네 집에서 오곡밥을 훔쳐오고 누구네 김장독에서 김치를 퍼오고 해서 손으로 쭉쭉 찢어먹으면 그렇게 달았는디. 지금은 그런 맛이 다 어디로 가버렸디야."
"귀밝이술, 그거 있잖여. 보름날 아침에 할머니가 나이가 어린 우리들에게도 한 잔씩 마시라고 줬잖여. 어린 나이에도 그 술이 그렇게 맛이 있었당께. 우리집은 좁쌀과 누룩으로 술을 했는디 지금도 그 솜씨를 아무도 따라가질 못혀."
흘러간 세월은 달콤하고 아름다운 것들로만 기억되는 법이다. 도시에서 자란 내게는 공백으로 있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을 남들의 추억들로 채웠다. 동네 지인들과 반세기 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우리들만의 정월 대보름을 즐겼다.
낮에 내린 비로 오늘은 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백신 접종이 정월대보름 달을 덮어버려 불꽃이 튀고 달집을 태우는 대보름 이벤트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내년에는 오곡밥에 아홉가지 나물은 못 먹어도 전염병은 물러가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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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의 시골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조근조근하게 낮은 목소리로 재미있는 시골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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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보름밥은 못 먹는 거지유?" 서운한 어르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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