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 학교 폭력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여자 프로배구 흥국생명의 '쌍둥이 자매' 이재영·이다영 선수가 지난해 10월 21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GS칼텍스와의 경기에 출전한 모습.
연합뉴스
과거 학교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프로배구의 이재영, 이다영 쌍둥이 자매의 영구 퇴출 여론에 대한 아이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작년 수능을 치른 예비 대학생 일곱 명을 온라인으로 만나 그들의 생각을 들었다. 배구에 문외한인 경우라도 그 둘을 모르는 아이는 없었다. TV 등에 자주 출연해서인지 그들이 운동선수가 아닌 연예인 같다고 했다.
어딜 가나 이 이야기뿐이지만 새삼스럽진 않다고 했다. 학교폭력이 어디 어제오늘의 일이냐는 거다. 여론이 들끓다가도 잠잠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흐지부지됐던 과거의 사례들을 아이들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소나기만 피하면 된다는 처세술은 누가 가르쳐서 배운 게 아니다.
10여 년 전의 죄를 그때 벌하지 않고 지금 문제 삼는 건 가혹하다는 아이도 있긴 했다. 대부분은 학교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라도 일벌백계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었다. 다만, 한 아이의 발언에서 여론의 대체적인 반응과는 적잖은 차이가 느껴졌다.
"번지수가 틀렸어요. 제 또래 중에 이번 일을 학교폭력의 문제로 보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처음 SNS에 글을 올린 피해자의 분노도 비단 학교폭력의 상처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가 분노한 정확한 이유를 알아야 하는데, 정부 등의 대책을 보면 좀 엉뚱하다 싶어요."
그는 학교폭력 사안에 매몰되면 핵심을 놓치게 된다고 했다. 언뜻 학교폭력에 둔감한가 의심될 정도였다. 학창 시절 운동선수였던 사람 치고 폭력을 경험하지 않은 경우가 어디 있겠느냐며 반문부터 했다. 아마 해외로 나가 스타가 된 선수들도 나가기 전까지 맞아가며 운동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과거와 달라졌다면, 그저 '공공연함'의 차이일 뿐이라고 했다. 대놓고 때리느냐, 눈치 보며 때리느냐의 차이라는 거다. 그러면서 폭력, 특히 학교에서의 폭력은 '행위'가 아니라 '문화'라고 덧붙였다. 당시의 위계나 서열에 따라 한 번 행해지고 마는 게 아니라, 제자와 후배에게 세대에 걸쳐 전승된다는 뜻이다.
한 아이는 욕설과 체벌을 두고 연습 과정에서 적절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있다며 짐짓 두둔하기도 했다. 군대에서 구타가 필요악인 것도 같은 이유라며, 그의 아버지가 들려주었다는 경험담을 전했다. 요즘 아이들이 학교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과거에 견줘 크게 높아졌다고 보는 건 섣부른 생각이라고 잘라 말하는 아이도 있었다.
'때린 아이는 기억을 못 해도, 맞은 아이는 평생 상처가 남는다'는 말도 반만 맞는 이야기라고 했다. 때렸든 맞았든 영원히 가해자와 피해자로 머무르진 않기 때문이라는 거다. 가해자가 다른 곳에선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는 자신의 상처를 더 약한 이를 괴롭히며 보상받으려 하는 법이라고 말했다.
학교폭력 가해자의 두 가지 유형
갓 스물을 넘긴 아이들의 심드렁한 반응은 30여 년 전 내 또래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가해자든 피해자든, 학교폭력은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묵인하고, 참고, 삭이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덮어온 학창 시절의 일상이었고, 졸업생에겐 '추억 거리'였다. '복날 개 패듯 한' 교사와 '삥 뜯은' 선배, '갈구던' 친구에 대한 분노도 그렇게 희석되어갔다.
"그냥 못 견딜 만큼 억울한 거예요. 세상이 왜 이리 불공평하냐고 하소연한 거죠."
많은 아이들이 피해자에 빙의된 듯 이렇게 답했다. 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피해자의 고통에 100% 공감이 된다고 했다. 자신을 그토록 괴롭히던 이들이 일약 스타가 되어 사람들로부터 온갖 찬사를 받는 현실이 괴로운 거라고 진단했다. 그들의 인기와 명성이 높아질수록 자신의 삶은 점점 위축되고 피폐해지는 것을 느꼈을 거라고 말했다.
오래전 겪었던 학교폭력에 대한 고발이라기보다 비뚤어진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낸 것이라는 주장이다. 피해자는 숨죽인 채 살아가고 있는데, 가해자가 저토록 당당할 수 있느냐는 한 맺힌 토로라는 거다. 그들의 태도가 세월이 약이 되어 시나브로 아물던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격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나마 여론의 호응이 있어 천만다행이라고 덧붙였다.
"TV나 인터넷에 가해자의 얼굴이 자주 등장하지 않았다면, 이번 사달은 애초 일어나진 않았을 거라고 봐요. 하다못해, 언론에서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아름답게 포장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시끄럽진 않았을 걸요. 이건 피해자의 처지에서 가혹한 2차 가해 아닐까요?"
몇몇 아이들은 저들이 학창 시절 가해자로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배경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학교폭력 가해자라고 다 같은 가해자가 아니라는 거다. 경험상 학교에는 가해자의 유형이 두 가지로 나뉜다고 말했다. 드러내 말하지 않을 뿐, 모두가 공감할 거라고 했다.
'괴롭혀도 되는' 아이와, '괴롭히면 안 되는' 아이. 이는 학교폭력의 죄질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부모의 '능력'에 따라 결정된다고 한다. 대개 성적이 우수하거나 집이 부유한 경우, 가해자라도 '까방권(욕먹지 않을 권리)'을 인정받는 경우가 흔하다는 뜻이다.
솔직히 과거에도 그랬다. 정도가 심각하다면 모를까, 웬만하면 화해하도록 교사가 은근히 중재에 나서곤 했다. 학교폭력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이 크게 강화되었지만, 교육 기관인 학교가 아이들을 무작정 법적으로 처벌하는 것이 온당하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여전히 큰 터다.
반대로 '조건'을 갖추지 못한 아이가 욱했다가는 십중팔구 탈이 난다. 더욱이 피해자가 '조건'을 갖춘 집안의 아이라면, 중재는커녕 원만한 해결 자체가 요원하다. 심지어 학교를 찾아와 '저런 자식 낳은 적 없다'며 나 몰라라 하는 가해자의 부모도 봤는데, 이럴 땐 그야말로 속수무책이다. '조건' 앞에서 현실은 늘 교육자적 양심을 짓누른다.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근본 대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