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염온동의 독립운동을 전하고 있는 당시 <조선일보> 기사(1923. 4. 17) 독립운동가 염온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서 강원도를 대표하는 의정원 의원으로 보궐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조선일보
1926년 7월 상하이 3·1당에서 창립된 임시정부경제후원회(위원장 안창호)에서는 이유필·임필은과 함께 회계검사원에 임명되어 활동했다. 이 후원회는 임시정부를 유지하고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후원금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였다.
그는 또한 1927년 3월에는 상하이 한인청년회 창립총회에서 집행위원에 선출되었고, 같은 해 12월에는 '청년회의 진보 발전을 기하는 데 있어 청년회의 연맹을 필요로 하여' 결성된 북경·상하이·광주·남경·무한 등 5개 지역 한인청년회의 연합체인 한인청년동맹 결성에 참여하여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염온동은 소설 <상록수>와 불후의 저항시 <그날이 오면>의 저자로 유명한 심훈의 항주 시절 친구이기도 했다. 심훈은 1931년 한 잡지(「천하의 절승 소항주유기(蘇杭州遊記)」, 『삼천리』 제16호)에 쓴 글에서 1920년대 초 중국 망명 시절 사귄 염온동에 대한 그리움을 다음과 같이 드러내기도 했다.
"그때에 고생을 같이하여 허심탄회로 교유하든 엄일파, 염온동, 유우상, 정진국 등 제우가 몹시 그립다. 유랑민의 신세 부유와 같은지라 한번 동서로 흩어진 뒤에는 안신(雁信)조차 바꾸지 못하니 면면한 정회가 계절을 따라 걷잡을 길 없다.(맞춤법은 현대어로 바꿈)"
심훈이 1921년부터 1923년 귀국하기 전까지 항주 치장대학(之江大學)에서 공부했는데, 이때 염온동과 만났던 것으로 보인다. 염온동이 이때 함께 지강대학에 다녔을 가능성도 있다.
염온동은 1929년에는 남경에서 민병길·윤기섭·성주식·신익희·연병호·최용덕·안재환·김홍일 등과 함께 한국혁명당을 조직한다. 한국혁명당은 사상의 정화와 독립운동 진영의 단결을 꾀함과 동시에 산하에 무력 행동대인 철혈단(단장 안재환)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철혈단은 기관지로 <우리길>도 발간하며 독립사상을 고취하였고, 단원 훈련과 교양에 이바지했다.
염온동은 한국혁명당에서 김창화·나월환·이건호·이영희·최경수 등과 함께 중견 간부로 활동했다. 한국혁명당은 1932년에 이르면 당원이 약 40명가량으로 늘어났고, 상하이와 난징 등지에서 계속 활동했다.
1932년 염온동은 다시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어 1935년 11월까지 활동했다. 1934년 한국혁명당과 만주에서 온 한국독립당이 합당하여 신한독립당을 결성할 때도 신한독립당에서 활동했다.
염온동은 일제가 아시아-태평양전쟁을 본격적으로 벌이던 1941년에는 광복군 총사령부 부관처 관리과장으로 임명되어 근무했다. 1944년 6월 5일부터는 임시정부의 군무부 총무과장 겸 선전부 간사로 임명됐고, 같은 해 9월에는 군사편찬위원회 간사로 선임되어 활동했다.
염온동을 군무부 총무과장으로 추천한 사람은 당시 임시정부의 군무부장으로 있던 의열단 출신의 김원봉이었다. 염온동은 1945년 3월부터는 임시의정원 의원에 다시 선출되어 해방될 때까지 활동했다.
염온동의 삶은 말 그대로 8·15 해방 때까지 일생을 조국의 해방을 위한 헌신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일제의 패망 후 귀국을 준비하던 중 1946년 1월 해방된 조국 땅을 밟아보지도 못한 채 중국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해방된 조국이 염온동의 유족에게 한 일은?
이렇듯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음에도 염온동은 1977년에 가서야 뒤늦게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그러니까 염온동의 부인과 아들이 조선일보를 찾아 어려움을 호소한 1972년 당시 염온동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조차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염온동의 부인과 아들은 1955년, 월북한 박건웅과 연계하여 남북협상을 주장하는 제3세력을 구축하려 했다는 죄로 김선희(김선의)는 무기징역을, 염낙원은 징역 20년을 언도받고 옥살이를 해야 했다. 이들이 언제까지 감옥살이를 했는지에 대한 언론보도는 없지만, 이들은 1972년의 <조선일보> 보도보다 훨씬 더 파란만장한 삶을 산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