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채의 동국역사(1899)- 1899년 광무3년 학부편집국에서 간행된 보통교과 동국역사, 대한 제국 말의 학자이며 서예가인 현채(玄采)가 지은 역사책. 어린이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올바르게 가르쳐 애국심을 길러 주기 위해 지은 교과서이다.
이병길
최천택은 다음과 같이 기록을 남겼다.
"17세에 우리나라 역사를 먼저 알아야 되겠다고 느끼고 소장한 <동국역사(東國歷史)>를 복사 출판하고자 등사판을 구입하여 하학(下學) 후에는 자필로 원지에 옮겨 쓰고, 한 편 찍어내어 배부하였다. 이때 일본 관헌은 일한 합방 때 한국 역사에 관한 서적을 가가호호(家家戶戶)마다 수색하여 압수한 뒤 불태워 버릴 때라 나 자신도 발각되어 제1차로 경찰에 붙잡히었다. 나는 피검 10일 만에 부형들의 운동으로 석방되어 무사하였으나 이때부터 일본인 북촌(北村) 형사가 부단히 나를 감시하게 되었다."
정공단 아이들뿐만 아니라, 생각이 깨어있는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나라 걱정을 했다. 지금이야 어린아이로 생각할 10대 초반에 그들은 대한제국의 망국을 눈앞에 두었고. 쇄국과 개화 갈등을 시시각각 온몸으로 느끼며 살았다.
무엇보다 부산은 다른 지역보다 일본의 신문물이 일찍 들어와 격랑의 현장이라 애국적 정열이 자연 샘솟게 하였다. 사회적 환경이 그들을 애국자로 만들고 있었다. 1907년 최익현의 장례식을 직접 눈으로 보았고, 1909년 남순(南巡) 길에 나선 융희황제(순종)가 부산항에 정박 중인 일본 군함을 참관하러 가는 도중 지금의 자갈치 시장에서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목선을 타고 가는 모습을 보고 끓어오르는 치욕감과 참담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목선과 군함은 한국과 일본의 경제와 국력 차이를 상징적으로 느끼게 했다.
왜병들은 의병에게 자신들이 묻힐 구덩이를 스스로 파게 하고 끓어 앉힌 후 왜병이 칼로 목을 치면 구덩이에 떨어지고 그것을 동료 의병이 파묻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이들은 자랐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애국심이 솟아나지 않았겠는가? 때로는 웅변가와 애국자인 이동휘, 안창호, 남형우 등의 애국을 강조하는 강연을 들으며 독립에의 의지를 다짐했다. 이제 교육을 통해 신문물을 접하고, 언문을 깨치면서 <대한매일신문> 등의 신문 기사를 돌려 읽었다. 그리고 국내외 영웅 위인전을 읽었다. 경술국치로 나라 잃은 치욕 울분은 가슴에 평생을 두고 민족적 분노로 쌓여있었다. 점차 아이에서 소년으로 성장하며 애국심이 가슴 한가운데에 자리한 학생들이 있었다. 정공단 아이들도 그런 학생이 되었다.
을사늑약 이후 1906년 8월 통감부는 '보통학교령'을 반포하고 소학교의 폐지와 함께 역사교육과 지리과를 통합하여 국사교과서의 입지가 사라졌다. 1908년 '교과용도서검정규정'에 이어 1909년 출판법 반포로 '구 학부' 편찬 교과서를 발매 금지했다. 이 때문에 당시 학생들이 보았던 한국사 책들이 사라졌다. 조선사람이 조선의 역사를 배우지 못하게 되었다. 역사교육의 부재는 민족정신의 퇴화로 연결될 수 있었다.
부산공립상업학교에 진학을 한 최천택은 상업과목 중심의 학교 교육에서 우리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우리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사라짐에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가 한국사 책을 압수하고 판매 금지한 상황이라 역사책을 구할 수도 읽기도 어려운 시절이었다. 천택은 '우리 역사 알기'가 필요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의 나이 17살이었던 상업학교 2학년 때인 1913년이었다.
최천택이 배포하려 한 역사책은 <동국역사(東國歷史)>였다. 천택은 한문체로 간행된 현채(玄采, 1856~1925)가 쓴 중등용 교과서 <동국역대사략(東國歷代史略)>(1899)을 소학교용으로 쉽게 고쳐 국한문혼용체로 서술하여 1899년 학부에서 간행한 소학교용 한국사 교과서인 <보통교과동국역사(普通敎科東國歷史)>에 주목했다.
충군 애국정신을 고취하고 만국(萬國)에 명예를 떨칠 수 있는 교과서였다. 5권 2책으로 총 359면 12행 28자로 이루어졌으며, 단군부터 고려 말까지를 대상으로 하여 편년체 서술체제였다. 단군에서 역사를 시작한 것은 자주적 역사 인식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런데 이 책을 최천택은 부산진공립보통학교 은사가 가지고 있던 책을 빌려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은사는 김용세 선생이었을 것이다.
최천택은 역사책을 등사하기 위해 등사기와 잉크, 종이 등이 필요했다. 일단 경비는 다소 유복한 최천택이 부담했다. 그의 아버지 최차구(崔此球)는 당시 해운대, 가야 등지에 많은 논밭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부친의 사망으로 모친이 재산을 관리했지만, 최천택이 어느 정도 사용할 능력이 되었다. 어느 정도 준비가 되자 최천택은 정공단 인근에 사는 박재혁, 김병태, 박흥규와 함께 모여 등사를 하기로 했다. 친구들에게 "조선인이 조선의 뿌리를 모르고서야 어찌 조선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라며 민족혼을 찾기 위해 역사책 읽기가 중요함을 역설하였다. 천택은 일제가 압수하여 볼 수 없는 역사책을 읽게 하자는 목표를 가졌다. 배포 대상은 보통학교 학생이 아닌 상업학교 학생들로 생각했다.
400쪽이나 되는 책을 등사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먼저 푸른색 밀납종이에 철필로 글씨를 썼다. 힘을 조금만 주어도 밀납종이가 찢어질 수 있어 조심해야 했다. 철필로 글을 쓰면 양초 같은 것이 긁어져 나왔다. 그것을 등사판에 고정하고 밑에 종이를 두고 잉크로 묻힌 롤러를 밀면 종이에 등사가 되었다.
글을 쓰는 일과 등사하는 일, 그리고 책을 제본하는 3단계의 작업이었다. 때는 봄날의 5월이라 밤이 깊어지는 줄도 모르고 신나게 일을 하였다. 처음에는 2백 부를 찍어 상업학교 학생에게만 나눠주기로 했었다. 그러다가 욕심이 생겨 총 3백 부를 찍었다.
박재혁이 "책을 만들면 어디에 배포하는 것이 좋을까?" 하자, 동생뻘인 김병태가 "형, 이왕이면 형이 다니는 부산공립상업학교에만 배포하지 말고 다른 학교에도 배포하는 것이 어떨까?" 하였다. 그러자 천택이 "그래, 민족의식이 강한 동래고보(현 동래고교), 일신여고(현 동래여고), 부산항고녀(현 경남여고), 조선인 학숙 등의 학생대표들에게 나누어 돌려보게 하자"라고 하였다.
결국 처음보다 계획이 확대되었다. 책을 배포할 대표 학생은 최천택이 관계한 광복단원이었다. 당시에 오택이 관계했다면 경남학생연합회 대표 학생이었지만 동국역사 배포에 오택은 관계하지 않았다. 동국역사 배포사건은 그만큼 은밀한 작업이기도 했다. 처음으로 항일 행동을 하는 것이기에 또래이지만 비밀을 보장할 만한 사람 중심이어야 했다. 결국 좌천동의 정공단 아이들 중심일 수밖에 없었다.
1차로 110부는 네 사람이 나누어 보자기에 싸 들고 각자 맡은 대로 지목된 학우들을 꾀내어 나누어 주었다. 은밀한 작업은 성공했다. 2차 배본 대상은 상업학교가 아닌 동래고보와 일신여고, 항고녀의 학생과 임정학숙 같은 조선인 학숙 학생이었다. 개개인을 방문하여 2차로 70권을 나누어주었다. 3차분 90권을 완성해 최천택의 집에 보관하여 배부하려 하였다. 3회째 배부할 무렵 형사에게 체포되어 등사기 등 일체를 빼앗겼다.
책을 불법으로 등사하여 배포하는 일은 출판법 위반이었다. 그는 10일간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친구들을 배신하지 않았다. 배신하지 않은 대가는 반죽음 상태였다. 정공단 아이들은 조마조마했다. 언제 형사가 와서 잡으러 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형사들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 사이 최천택의 모친은 뻔질나게 경찰서를 드나들며 간곡한 교섭을 하였다.
학교에서도 최천택을 책임지겠다며 선처를 요구했다. 아직 배움에 있는 학생으로 단지 친구들에게 역사를 알게 하겠다는 것이지 그것이 배일 활동은 아니라고 모친은 경찰에게 말하고, 앞으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하게 교육하겠다 하였다. 물론 모친은 경찰에게 싫지만 어떤 비용을 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뿐인 아들을 영영 볼 수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천택을 학교와 모친의 보증으로 10일 만에 풀려났다. 하지만 이후로 그는 일본 경찰의 요시찰 대상이 되어 항상 가타무라(北村) 형사의 감시를 받았다.
최천택이 고문을 당하면서도 동국역사 등사와 관련하여 자백하지 않았기에 친구들은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 최천택의 일제 경찰 고문 버티기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32년 동안 크고 작은 사건에 연관돼 무려 54회나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지만 한 번도 형을 살지 않았다. 그만큼 고문을 받고 자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 경찰도 "부산에서 매 잘 맞기로는 최천택이 제일"이라고 탄복했다. 해방 후 좌익으로 몰려 헌병대에 끌려가 최천택은 살아남았지만, 친구인 동산 김형기와 엄양준은 돌아오지 못했다.
<동국역사> 책은 연활자본(22.8×16.2㎝), 5권 2책으로 총 359면 12행 28자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을 등사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등사기와 푸른색 밀랍종이, 가리방, 철필, 등사용 잉크 그리고 종이가 필요하다. 1917년에 습자지 20장이 4전이었다. 습자지로 1권의 종잇값만 대략 70전이 든다. 300부라면 210원이 든다. 1914년에 관립고등학교 한 달 월사금이 50전이니 1년 월사비 합이 6원이니 210원은 엄청난 돈이다. 실상 등사본을 360쪽 300부를 만든다는 것은 경비만이 아니라 인력도 많이 필요한 일이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학생 4명이 이와 같은 일을 했다는 것은 상상외의 일이다. 그래서일까. 최천택 자신의 수기에는 '한 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등사기를 사서 한 편만 찍었다고는 볼 수 없다. 누군가의 경제적 도움이 없이 학생 4명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임은 분명하다.
또 당시 부산 시내 학생 200여 명에게 배포하였다는 것은 다소 과장된 것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최천택, 박재혁, 김병태, 박흥규가 동국역사 배포사건에 관계하였고, 책은 분명히 등사하여 배되었고 최천택은 형사에게 체포되었다. 등사한 책의 수량과 경비와 관계없이 최천택과 정공단의 아이들이 함께 항일운동을 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지금도 쉬운 일이 아닌 일을 당시에 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때론 독립운동이 과장된 부분이 있을 수 있다. 과장은 국내외 민족 구성원들에 항일운동의 성과를 드러내고 그것을 강조함으로 독립의식을 고취하려 한 측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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