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문 글귀를 화선지에 옮기는 엄형섭 어르신. 그의 붓에 65년을 이어온 열정이 녹아 있다.
<무한정보> 김수로
가르쳐주는 이 하나 없이 홀로 붓을 잡은 세월이 65년.
충남 예산군 대술면 엄형섭(84) 어르신은 항상 배움에 목말랐지만, 학비를 댈 형편이 안 돼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19살 때 산에 올라 3년 동안 붓글씨에 매진했다.
"나무를 베어다가 부엌 한 칸, 방 한 칸짜리 집을 지었어요. 거기서 혼자 공부를 한 거예요. 한글도 쓰다 한문도 쓰다…. 아버지가 한학을 하셨어요. 그걸 보고 쓰는 법을 터득하고. 그렇게 낙서로 시작한 겁니다."
그가 글씨를 쓰는 서실 바닥은 차갑다. 몸과 마음을 깨어있게 하기 위해 일부러 겨울에도 난방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곳에서 매일 두세 시간씩 붓에 먹을 적신다.
어린 시절부터 집념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중학생 때, 다리를 다쳐 수개월 동안 학교를 가지 못해 뒤늦게 진도를 따라잡기가 여간 어려운 상황이 됐다. 고등학교 시험을 포기할 수 없었던 엄 어르신은 단칸방을 얻어 당시 반에서 1등 하던 친구와 함께 두어 시간씩만 자며 밤새 공부했다. 추운 겨울밤엔 이불 속에 전등을 넣어놓고 그 안에서 책을 볼 정도였다고 한다. 한 달을 꼬박 그리하고 나니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다.
그 집념으로 군에 입대해서도, 대술농협에 취직해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붓을 놓지 않았고, 어딜 가나 글씨가 눈에 띄었단다.
"한 번은 농협 충남연수원으로 교육을 받으러 갔어요. 책자에 '대술단위농업협동조합 엄형섭'이라고 이름을 썼는데 연수원장이 그걸 보고 잠깐 오라고 하더니 '집에서 지필묵 가져와라, 다른 건 됐고 이것만 써라'라고 하대요. 대신 대회 나가면 농협 소속인 걸 밝히고 나가라고요. 그래서 교육받는 3주 동안 글씨만 썼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