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노동부 박화진 차관이 1월 25일 전문가 패널 최종보고서에 관해 E-브리핑을 하는 모습.
고용노동부
결국 잃어도 본전 아니냐, 즉 국제사회에서 지적당하지 않으면 사회복무제도를 유지할 수 있으니 이익이고 지적당한다 해도 시간을 벌면서 버티면 된다는 마인드에 힘을 실어줄 것이다. 어떤 조직이 불법에 익숙해지는 전형적인 패턴이다. 이런 판단 하에서 강제노동협약을 비준할 시, 이집트와 터키의 사례처럼 ILO에게 지속적으로 사회복무요원 문제 때문에 협약위반국으로서 지적당하게 될 수 있다. 과거에는 협약이라도 비준하지 않았었지만, 협약비준까지 한 상황에서는 더 큰 구속력 하에서 제재대상이 될 수 있다.
교훈 하나, 국제협약은 부차적이다
다음은 교훈. 현 FTA 노동조항이 궁극적으로 노동기본권 향상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노동과 무역을 연계하는 선진국의 통상압력이 개발도상국 인민들의 노동기본권을 위한 것일까? 현실에서 FTA 노동-무역 연계조항은 보호무역주의를 관철할 수 없는 세계화 시대 자유무역 압력에서 살아남기 위해 제3세계 국가들에게 강력한 노동규제를 따르게 함으로써 자국 산업의 경쟁력을 보호하고 노동조합의 반발을 무마하는 명분으로 활용된다. 한-미 FTA에서 드러나는 미국의 통상정책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한-EU FTA의 관점은 조금 다르다. 물론 보호무역 수단으로서의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미FTA가 무역제재를 강조하는 반면, EU의 기본적인 접근법은 좀 더 높고 포괄적인 노동기준을 요구하되 대화를 통한 해결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개발도상국의 노동인권 향상을 자국산업의 상대적 이익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상대국의 경제적 잠재력을 높이는 계기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한-EU FTA에서 노동조항 위반에 대해 제재를 규정하지 않은 이유는 이런 까닭이다.
문제는 미국식 접근은 미국 자신이 유별날 정도로 ILO 기본협약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ILO 기본협약 비준 문제로 한국정부를 상대로 FTA 노동조항을 현실적으로 발동시키기가 쉽지 않다는 점, 과테말라를 상대로 패소한 경험에서 보듯 실제 제재 발동시 정치적 부담이 상당하다는 점 때문에 현실에서 유효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 정부가 자국의 노동기준을 강화시키고 ILO 기본협약을 비준하는 등의 변화를 통해 보호무역을 관철시키려는 태도를 보인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지만, 당분간은 쉽지 않을 것이다. 최우선 타깃인 중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동맹국을 상대로 한 무역분쟁은 자제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EU의 접근법은 이번 무역분쟁 과정에서 그 한계를 드러냈다. 무역제재가 없다면 적어도 시민사회의 협력과 대화가 활발히 이루어져 각국 내에서 여론을 만들고 사회적 대화나 시민사회-노동계의 국제교류 등을 통해 내부 변화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 같이 국내 산업의 패권을 쥐고 있는 기득권의 지지와 압력에 따라 '중상주의적'으로 행동하는 정부를 상대로는 쉽지 않다. 자랑할 때는 G10 멤버임을 내세우고 불리할 때는 개발도상국 코스프레를 하면서 자국의 특수성을 고려해달라고 읍소하는 전략을 천연덕스럽게 내세우는 것에 시민들은 익숙하다. 사회적 대화 테이블에서 강제노동 문제는 아예 배제되다시피 했고, ILO협약 비준을 외치는 시민사회와 노동조합은 코로나 위기 속에서 고립되었다. 결국은 시민사회 내부의 움직임 없이 FTA조항만 가지고 어떤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이 아니다.
따라서 사회복무요원들의 강제노동 문제 해결은 당사자들이 결집하여 여론을 만들어 내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목소리가 없다면 국제기구 역시 움직이지 않는다. 국제사회의 전향적 판단이 어떤 '계기'나 정당성의 근거를 만들어줄 수는 있지만, 도라에몽 주머니처럼 원하는 걸 다 갖다 줄 수 있지는 않다. 사회복무요원들의 단체 행동과 시민사회와 노동계의 협조가 동반되지 않고서 FTA협약이나 국제기구의 판단에 의존하는 것만으로는 풍향은 쉬이 바뀌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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