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리 간청해도 소개글과 댓글을 보여주지 않는 아들이 야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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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자신이 만나는 세상은 '엄마 출입금지'라고 선언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아이가 나에게 심리적 거리를 둘 때면 녀석을 위해 바친 지난 세월이 스쳐 지나가며 서운함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게 사실이다. 벌써 좀 컸다고 그깟 카톡 가지고 철벽 치는 녀석이 생각할수록 매정하다.
비슷한 시기에 한 친구도 자녀한테 서운한 일이 있나 보다. 이제 갓 20살이 된 아들한테 '고지식한 엄마'라는 소리를 들었다며 단톡방에서 하소연을 한다. 우리 또래 사이에서는 자녀와 소통 잘하고 이해심이 넓어 '보헤미안 영혼급'이라 불리기도 하는 그녀인데, 고지식하다니...
입시를 마친 그녀 아들이 귀가 시간에서 해방시켜 줄 것을 끈질기게 요구 중이란다. 이제 좀 친구들과 어울리며 자유롭게 즐기고 싶다고 말이다. 아직도 귀가시간을 지키라는 엄마가 너무 고지식한 게 아니냐며 아들이 엄마의 지인들에게 의견을 물어보라는 내용이었다. 아들을 걱정하는 친구의 심정이 충분히 공감되는 동시에 슬슬 세상을 자유롭게 겪어보고 싶어 하는 친구 아들의 심정도 십분 이해가 되었다.
가만 보니, 엄마 간섭에서 벗어나고파 철벽 치는 내 아들이나 귀가시간 해방을 요구하는 친구 아들이나 비슷한 입장인 것 같다. 그간 엄마의 간섭과 통제를 곧잘 따르던 자녀들이 이제 막 성인이 되면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당당하게 주장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아이들이 왜 갑자기 이런저런 마뜩잖은 주장들을 펼치는 걸까?
어쩌면 나와 친구는 서운한 마음을 비워내고, 아들들이 주장하는 바를 수용하려고 노력해 볼 때인지도 모른다. 제 목소리를 높이는 이런 사소한 순간들이야말로 자녀가 자율적으로 성장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중요한 시기일 수 있으니 말이다.
이론적으로야 자녀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자율적으로 키우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다. 하지만 실제로 실천하기 어려운 이유는 허용한 자율의 대가가 혹여라도 어떤 혹독한 결과로 돌아오게 될지 걱정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니 늘 불안한 부모는 자녀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선뜻 간섭과 통제를 거두기 어려운 것이다. 게다가 자율의 과정에는 늘 혼란이 따르고, 그 혼란기를 제대로 통과해야만 뭔가를 배우게 되는데, 그 혼란한 시기를 부모로서 함께 겪어낼 자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를 믿고 자율적으로 키워낸 한 지인이 계시다. 워킹맘이었던 그분은 두 아들들이 초등 저학년일 때부터 부엌을 아예 아이들에게 맡겼다고 한다.
하교한 아이들은 좌충우돌이었지만, 어쨌든 알아서 간식과 때로 저녁까지 챙겨 먹었고, 한 음식이 질리면 새로운 메뉴를 시도하고 나중에는 파스타 같은 것도 해먹었단다. 부엌은 늘 난장판이었고 심난했지만, 아이들이 자라며 점차 정돈되어 갔고, 아이들에게는 요리라는 즐거운 취미가 생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