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많은 집들 중에 내 한몸 누일 전세집이 없다는 통탄 끝에 집을 사기로 마음 먹었다.
연합뉴스
나는 조그마한 오피스텔에 산다. 10평 남짓한 원룸형 오피스텔은,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혼자 살기에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소중한 나의 삶의 보금자리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홀로 전세살이를 하며 이사를 다니는 것에 진절머리가 날 때쯤 나는 집을 사기로 마음을 먹었다.
전세 계약이 끝나기 6개월 전부터 집주인의 눈치를 살피며 계약이 연장될 수 있을까 노심초사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집을 빼야 할 상황에 부딪치면 늘 예외 없이 전셋집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곤 했다.
서울에 집이 이렇게 많은데 내 몸 하나 누일 전셋집 하나가 없다니, 이것이야말로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한탄과 고난의 시간을 견뎌내야만 겨우겨우 전셋집을 구하는 일이 반복됐다. 나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전셋집 구하기'에서 탈출하는 길은 하나, 집을 사는 거였다.
혼자 살기 적당한 공간에, 집값도 많이 비싸지 않은 오피스텔을 샀다. 나의 피땀눈물로 한 푼 두 푼 모아놓은 돈에 영혼까지 끌어모아 장만한 나의 보금자리는 크고 화려하지는 않아도 따뜻하고 아늑했다.
남들은 아파트를 사서 두 배로 뛰었네, 몇 억을 남겼네 할 때도 그건 남의 이야기일 뿐, 난 그저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심지어 이사를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는, 오롯이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는 것에 행복했다.
코로나19, 집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벌써 이 집에서 생활한 지도 4년이 흘렀다. 혹여 나의 소중한 집에 먼지라도 앉을까 하루가 멀다 하고 쓸고 닦는 일은 이미 오래전에 마침표를 찍었지만, 마음에 안식을 주는 나의 집은 여전히 좋았다. 그런데 이런 나의 마음에 삐걱삐걱 틈이 생기기 시작한 건 코로나19가 시작된 이후부터였다.
예전부터 난 '집순이'였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실제로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그렇게 길지는 않았던 것 같다. 평일에는 회사에 다니니 당연히 집에 없었고, 야근이 생기거나 약속이 잡히면 집에는 잠시 들러 잠만 자고 나오기 일쑤였다.
주말에는 친구를 만나거나, 보고 싶던 영화를 보러 가거나, 하다못해 집에만 있기 답답해 근처 커피숍에서 혼자 커피라도 마시고 왔으니 하루 종일 집안에만 있었던 날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고, 상황은 달라졌다. 주말은 물론이고, 재택근무가 시작되면서 평일에도 주야장천 집에만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삼시세끼를 집에서 먹고, 내가 좋아하는 믹스커피도 먹다 지쳐 라떼 커피를 배달 시켜 집에서 먹는 상황까지 와 버렸다.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사방이 벽으로 막힌 집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예전엔 보이지 않던 단점들도 하나하나 눈에 띄었다. 그때쯤 집에 대한 나의 권태기는 시작됐다.
원룸형이다 보니 집의 한 곳에서, 정확히 얘기하자면 방 중앙에 놓인 탁자 근방에서 모든 일은 이루어졌다. 근무시간에는 탁자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일을 하다, 점심시간이 되면 노트북을 치우고 밥과 밥찬을 탁자에 올려 밥을 먹는다.
저녁에는 무료함을 달래줄 책이 펼쳐져 있거나 색칠이라도 하며 시간을 때우라고 친구가 보내준 물감과 팔레트, 물통이 탁자에 올라가 있다. 업무와 식사, 취미생활 모든 게 만능 탁자에서 시작되고 끝이 났다.
베란다가 따로 없어 만능 탁자 옆에 자리한 빨래건조대는 지나다닐 때마다 걸리적거려 발에 채이곤 했고, 라면 하나만 끓여도 웬 설거짓거리는 이렇게 많이 나오는지 더이상 그릇을 올려놓을 수 없는 작은 그릇 건조대를 산 지난날의 나를 탓하게 된다. 큰 걸 샀어도 놓을 데가 없었던지라, 한숨과 푸념을 내뱉는 나날이 늘어갔다.
베란다가 있었으면, 방이 하나만 더 있었으면, 거실이 따로 있었으면, 주방이 나눠져 있었으면, 바람과 소망이 하나둘 늘어가면서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작은 집에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빼꼼히 고개를 들었다.
집에도 권태기가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