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경 만경루에서 본 풍경저 멀리 강진만이 보인다, 그 너머에 고려청자 가마터가 있다.
서부원
산사의 시간은 느리게 간다. 걸음에 맞춰 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일까. 절 곳곳에 '경내에서는 뛰지 말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말도 아껴야 한다. 말이 많거나 떠들면 시간도 덩달아 쏜살같이 흐를 것이다.
며칠째 종일 경내를 돌았다. 스님들의 개인 공간과 공양간의 주방을 제외하곤 안 가본 곳이 없다. 법당 안 불상 수와 자세, 바깥벽에 그려진 그림과 글자 등을 마치 영어 단어장 암기하듯 보고 또 보았다. 궁금한 점은 종무소에 가서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비탈진 곳이라 절터도 좁고, 법당이라고 해 봐야 누마루 건물까지 포함해 다섯 채에 불과하다. 범종각과 사적비각, 템플스테이를 위한 요사채까지 모두 합해도 열 채 남짓이다. 더욱이 건물의 크기도 작은 데다 다닥다닥 붙어 있어 더 좁아 보인다.
방에 앉아 책을 읽다가 다리가 저리면 쉴 겸 경내를 돌았고, 글을 쓰다가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 다시 경내를 돌았다. 공양간이 맨 가장자리에 있어 끼니때도 매번 경내를 돌아야 했다. 이젠 돌계단이든 굽잇길이든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다.
간만에 햇볕 따사롭던 오후, 누마루에 걸터앉아 소일했다. 숲 바람 소리, 새소리, 풍경소리 등이 오후의 나른함을 깨웠다. 소리는 귀로만 듣는 게 아니라 눈으로도 볼 수 있고 감촉으로도 느낄 수 있다는 어느 시인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누마루 아래로 등산복 차림의 몇몇 관광객들이 지나갔다. 코로나 탓인지 절을 찾는 이들이 거의 없어 그들에게 뭐라도 챙겨주고 싶을 만큼 반갑다. 무슨 인연으로 여기 왔을까. 그들은 뭘 보고 뭘 가슴에 담아갈까. 괜히 다가가 말을 걸어보고 싶어진다.
그들은 안마당에 올라 앞뒤로 대웅보전과 만경루를 한 번 훑더니 되돌아갔다. 한 시간쯤 뒤에 온 중년의 관광객들도, 이어서 온 신혼부부로 보이는 두 젊은이도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았다. 곁에 세워진 안내판조차 읽지 않고, 사진 한 장 찍은 뒤 서둘러 절을 내려갔다.
조금만 여유를 갖고 찬찬히 뜯어보면 제법 볼 만한 게 많은데, 도리어 내가 조바심이 난다. 이래 봬도 백련사라며, 그들의 손목을 붙잡고만 싶다. 잠시 스마트폰을 끄고 느리게 가는 산사의 시간에 발걸음을 맞추면, 곳곳이 볼거리고 이야깃거리라는 걸 그들은 모른다.
절이 내 집인 양 친숙해지다 보니,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가 넘어지면 코 닿을 만큼 가까워 발품을 팔 필요도 없다. 대충 헤아려보니 여덟 곳쯤 된다. 나만의 '백련팔경(白蓮八景)'이라고나 할까.
제1경은 이전 산중일기에 이미 적었다. 원교 이광사의 동국진체 현판 글씨 석 점.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떨리는 그의 필체를 알현하는 것으로부터 백련사 여행은 시작된다고 적었다. 서예에 관심이 많은 관광객 중엔 이광사의 글씨만 좇아가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관련기사 :
잠 못 드는 도시를 떠나 이곳으로 왔습니다)
제2경은 만경루에서 내려다보이는 강진만의 원경이다. 비록 장쾌하진 않지만, 남해의 오밀조밀한 섬과 바다가 시시각각 다른 풍경을 만들어 낸다. 낮과 밤이 다르고, 오전과 오후가 다르다. 누각의 이름을 '만(萬)가지 풍경(景)'으로 지은 이유를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