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 모인 지지자 향해 주먹 쥐어 보이는 트럼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2일(현지시간) 텍사스주 할링전의 밸리 국제공항에 도착해 지지자들을 향해 주먹을 쥐어 보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미국-멕시코 국경에 건설된 장벽 완공을 기념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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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 정치인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시종일관 보여주었던 트럼프의 특이한 성격적 특징 또한 정치 냉소주의의 또 다른 현상이다. 정치적으로 소외되고 경제적으로 낙후한 중하층을 하나로 묶어 정치 세력화하는 과정에서 트럼피즘은 생명력을 획득했다. 이보다 더 구체적인 실체를 또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트럼피즘의 등장을 설명하려면 양당 체제를 떠받치고 있던 지지층의 이반 현상을 거론해야 한다. 이전까지 양당체제에 의해 양분되었던 지지층의 성격은 동전의 양면과 같았다. 정책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여줬을 뿐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았다. 트럼프 정권이 들어서던 시기를 전후하여 양당의 전통적인 텃밭에서는 변화가 감지되고 있었다. 백인 유권자의 이반 현상이 점점 뚜렷해진다.
투표 결과를 결정짓는 중산층의 표심 이동이 특징적이다. 중산층의 경우 자신에게 편의와 먹거리를 제공하는 쪽을 선택하게 된다. 백인 소외 계층의 경우 마음 둘 곳이 별로 없다. 인구의 70%를 차지하는 백인 유권자는 공화당에 기우는 성향이 강하다. 그러하기에 공화당 지지층에서의 변화를 예의 주시해야 한다. 공화당 내부에서도 친트럼프와 반트럼프로 나뉘면서 양 진영 간의 견제와 알력이 심화되고 있다.
아직은 미비하지만, 민주당 내 극우 보수 세력의 이탈 현상도 주목할 만하다. 트럼프 지지 세력 간의 연대가 실제로 이루어질지 앞으로 두고 볼 일이다.
서러운 중하층 파고든 트럼프
전통적 지지층의 이반 현상, 당내 갈등, 갈 곳 없는 중하층의 설움 등등 이 틈새를 파고든 것이 트럼프, 트럼피즘이었다.
조만간 전면에 나서게 될 밀레니얼 세대(30대)의 지지 성향에 따라 정치 지형이 송두리째 채 뒤바뀔 상황도 예상된다. 트럼피즘을 옹호하는 30대는 고리타분한 민주당, 권위 의식으로 가득 찬 공화당보다는 정치판을 아예 아수라판으로라도 만들어 놓고 있는 트럼프에 솔깃한다. '변화를 이끄는 보수' 이것이 밀레니얼 세대가 지향하는 목표일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트럼피즘이 시대의 변화를 이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더 나은 대안이 없는 한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것이 미국이 처한 현실이라고 본다. 이 와중에 제3의 세력이 등장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왜 이런 현상이 유독 최근에 자주 일어나는 걸까? 그 모든 이유와 원인을 트럼프 때문이라며 그에게 덮어씌우는 것은 합리적 추론이 될 수 없다. 시대의 흐름으로 이해해야 하며 결국 모든 정치적 문제의 출발점과 종착점인 경제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트럼피즘의 등장과 중산층의 몰락에는 서로 상관관계를 가진다. 한때는 미국의 번영을 일궈냈던 중산층은 예비 실업자군을 형성했고 경제 사정이 악화될 때마다 지속적으로 빈민으로 전락하고 있다.
2010년 인구조사에서 빈곤층으로 분류되는 인구는 약 12%였다. 백인이 차지하던 비율은 약 10%, 숫자로 환산하면 약 2천 4백만 명이 빈곤계층을 구성했다.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현실에서는 하위 중산층으로 분류되는 계층이 유럽의 기준으로는 빈곤계층으로 분류된다는 것이다. 하위 중산층이 더해지면 인구의 약 30% 정도가 상대적 빈곤층으로 분류된다. 이들은 또한 저학력 군으로 분류된다. 고급 일자리를 찾아서 대도시로 나올 수도 없기에 그나마 노동 인력이 있어야 하는 농촌과 공업지대에 남게 된다.
빈민 계층은 보건과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의료 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는 인구가 약 10%다. 노후 대책은 꿈같은 이야기다. 60세 전후로 은퇴하고 최저 생활비에도 못 미치는 정부 보조금에 의지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나 앞으로 10년 후, 20년 후에도 지금과 같은 수준의 혜택이(?) 지속될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빈민으로 전락한 이들과 위기에 직면한 중하층 백인에게 '미국을 다시 위대한 국가로 만들자'는 트럼프의 구호는 빈말이 아닌 절박한 호소다. 이들을 가리켜 단순하고 무식하다며 손가락질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어 적지 않게 놀란 적이 있다. 울분과 설움을 인종차별, 반유대인 의식으로 표현하는 그들만의 문화적 현상을 들여다보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중상위 중산층 백인들이 트럼피즘에 공감하는 이유를 설명할 방법이 없어진다. 중상위층의 백인이 트럼프에 기대는 현상은 부에 대한 가치관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개인주의적 가치가 지배하는 사회다. 빈곤은 게으름의 결과이고 부는 성실함의 결과다. 복지와 의료는 철저히 개인에게 속하는 문제로 인식한다. 따라서 부의 사회적 분배는 어불성설이다. 복지 정책에 사용될 예산을 늘리려고 세금을 올리는 것에는 항상 반대 입장이다. 부자와 기업의 감세 정책에는 그 누구도 반대의견을 내놓지 않는다. 트럼피즘이 추구하는 작은 정부와 적은 역할에 공감하는 이유다. 이를 미국이 떠안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로 인식하고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해야 옳지 않을까.
트럼피즘의 명과 암
한편, 트럼피즘의 등장으로 미국 정치사에 미칠 긍정적인 효과도 기대해 볼 만하다.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현시기에 찾아온 위기를 직감하고 있다. 관점이 약간 다를 뿐이다.
미국은 과거에는 위대했으나 현재와 미래는 불안하고 암울하다는 관점과 미국은 여전히 세계를 지배하고 있으며 초강대국의 지위에는 변함없다는 관점이 서로 대립하고 있다. 트럼피즘은 당대의 미국을 들여다보는 프리즘 역할을 했고, 미국이 처한 현실이 무엇인지 가감 없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미국식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완성체나 다름없다고 선전하던 미국식 민주주의의 모델이 허상임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모습을 이제는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트럼프 지지자들이 목청 터지도록 '위대한 미국'을 아무리 외쳐봐도 근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미국은 결코 위대해질 수 없다. 근본 문제란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하고 민주주의의 근간을 파괴하는 각종 차별주의와 불평등이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미국은 이미 오래전부터 온갖 차별이 만연해왔다. 그리고 불평등을 당연시하고 제도화했다. 계급, 계층 그리고 빈부 간의 격차는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고, 이제는 지역 간 갈등의 골마저 깊어지고 있다. 민주주의의 근간을 갉아먹는 근본 문제를 해결하려면 차별과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야겠지만 이마저도 요원한 것은 공동체 의식이 작동되지 않기 때문이다. 공동체 의식을 발동시킬 사상적, 정신적 그리고 문화적 토대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정치권이 나서서 해결해 보겠다는 의지조차도 찾아보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