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이 물러나고 다시 우리가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는 날이 오면 우리는 이 지겨운 마스크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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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싶은, 버릴 수 없는
코로나19 팬데믹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지나가면서 마스크는 우리와 가장 가까워진 물건이 되었지만 사실은 우리가 어서 빨리 멀어지고 싶은 물건이기도 하다. 마스크는 무언가를 가려서 보이지 않게 만들고 들고 나는 것을 방해하지만 무엇보다 그 자체로 불편하기 때문이다.
마스크는 우리가 보고자 하는 이들의 얼굴을 볼 수 없게 가리고 우리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간단히 말해, 우리의 자유를 제한한다. 자유롭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를 제한한다. 그런 사실은 서구의 보수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우리가 보기에 무지한 듯한) 이들 중 일부가 팬데믹의 상황에서도 마스크 쓰기를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그들의 타인에 대한 배려 없음은 무책임하다고 할 수 있지만, 개인이 그러한 자유의 제한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또한 당연한 욕구라고 이해해볼 수도 있겠다. 그런 만큼 마스크는 어서 벗어 던지고 싶은 물건이다.
그런데 달리 생각해보면, 마스크가 평상시에도 꼭 필요했던 물건이 아닌가 싶을 때가 많다. 어쩌면 우리가 이 팬데믹 시대에 마스크와 너무나 오랫동안 친밀해져서 일종의 스톡홀름 증후군❶처럼 작동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모르는 이들 앞에서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우리 얼굴, 곳곳에 무분별하게 위치한 폐쇄회로 감시카메라가 기록하는 우리 얼굴을 가려주는 마스크가 조금은 유용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주로 비말과 침방울로 감염되는 코로나바이러스의 특성을 고려할 때 평소에 우리가 얼마나 타인들과 수많은 분비물을 교환해왔던가를 깨닫게 되는데, 그런 생각에 가 닿으면 마스크는 감염병과 상관없이 평소에도 꼭 써야 하는 물건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래서 마스크는 어서 빨리 벗어 던지고 싶은 동시에 앞으로도 여전히 필요할 것만 같은 그런 물건이 되었다.
복잡하게 얽힌 마스크의 지형
돌이켜 보면 2020년의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도 우리는 이미 마스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 우리는 매년 겨울철부터 봄까지 서쪽에서 한반도로 밀려들어오고 또 우리나라에서 자체적으로 생산해내는 미세먼지와 황사를 고도로 필터링해 주는 마스크를 쓰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 대만, 홍콩, 일본과 같은 동북아시아 주변국과 동남아시아를 거쳐 인도까지 전 세계 주요 산업 생산의 벨트에 거주하는 시민들은 공기 중 부유하는 미세먼지로부터 건강을 위협받는 상황이다.
국경과 무관하게 흘러 다니는 산업 먼지의 공습으로부터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마스크를 일찍이 써왔다는 점이 어쩌면 동북아 국가들이 코로나19 팬데믹을 상대적으로 덜 심각하게 겪고 있는 것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팬데믹 이전에도 일상에서 마스크 쓰기라는 행위가 우리에게는 적어도 덜 낯선 셈이다. 심지어 지금은 코로나19와 미세먼지의 콤보 공격에도 마스크 하나로 대응할 수 있다는 점이 마치 일석이조처럼 보이는 착각이 들 정도다.
그렇다면 이 팬데믹이 물러나고 다시 우리가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는 날이 오면 우리는 이 지겨운 마스크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 마치 몸에 부착된 또 하나의 장기가 되어버린 것 같은 마스크를 더 이상 쓰지 않게 되는 날이 곧 올까?
안타깝게도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수년 이내로 계절성 독감처럼 우리 사회에 토착화되겠지만, 마스크는 여전히 필요하고 또 중요한 물건일 것이다. 그리고 인류가 만들어낸 미세먼지나 다른 공해 물질들도 현존 자본주의의 산업과 일상을 빠른 시일 내에 완전히 생태적으로 혹은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전환시켜내지 못한다면 언제까지고 우리를 따라다니며 괴롭힐 것이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마스크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에도 계속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 나아가 마스크가 우리 신체에서 바이러스의 출입을 막거나 미세먼지를 걸러내는 역할을 넘어서, 우리의 얼굴을 가리고 보호하는 것에서 더욱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것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