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탄리 쌍화차철도 운행이 중단된 경원선 신탄리역 주변은 적막하기 이를 데 없다. 지금도 역주변에 오래된 다방이 남아 있다.
변영숙
중년을 넘긴 여자가 마지 못해 의자에서 일어섰다. 오래된 낡은 소파와 집기들... 담배와 온갖 것이 뒤섞인 정체불명의 쾌쾌한 냄새가 찐득하게 묻어났다. 연탄 난로 위에서는 양은 물주전자가 끓고 있었다.
다시 문을 열고 나가고 싶은 마음과 달리 나를 주저앉힌 건 소설이나 영화에서 등장할 법한 부대 근처 허름한 다방이 불러일으킨, 흘러간 과거에 대한 '향수' 때문일 것이다.
"저 커피 주세요."
"우린 맥심 밖에 없는데 괜찮아요?"
"혹시 쌍화차도 있나요?"
"계란 넣어줘요?"
"네, 넣어주세요."
생전 처음 계란 쌍화차를 주문했다. 잠시 후 짝도 맞지 않는 잔받침에 받쳐 나온 쌍화차는 예상과 달리 칠흑 같이 깜깜한 밤하늘에 뜬 노란 보름달처럼 고왔다. 도심의 전통찻집에서 대접만한 잔에 나오는 걸쭉하고 텁텁한 쌍화차와 달리 맑고 향도 진했다. 쌍화차가 맛있다고 하자 약재를 사다가 직접 만든 것이란다. 예전에 근처에 많던 약재상도 다 없어졌다는 말도 덧붙였다.
"다방을 하신 지 얼마나 되셨어요?"
"한 30년 됐나?..."
"여기서만요?"
"동두천 쪽에서 하다가 이쪽으로 옮겨왔어요."
"요즘 힘드시죠?"
"사람 구경하기도 힘들어요. 사람이 너무 없어요. 사는 게 재미가 하나도 없어…"
옛날에는 정말 장사가 잘 됐었다고 한다. 근방에 부대가 있어 신병들과 제대하는 병사들, 휴가를 마치고 복귀하는 병사들 그리고 면회 오는 가족들 등 사람들의 왕래가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그때는 진짜 장사가 잘 되니까 몸은 고되도 진짜 재밌었어요."
여자의 얼굴이 처음으로 밝아졌다가 금방 다시 어두워졌다.
"동두천에 전철 다니면서부터 사람들이 줄었어요. 이젠 기차도 안 다니니까 아예 사람이 없어요. 코로나까지... 어떤 날은 하루에 한 명도 안 와요."
"다른 거 할 것도 없고 하니까 그냥 문열어 놓고 있는거죠 뭐. 이렇게 문 열어 놓고 있으면 이상한 사람들 많이 들어와요. 앉아만 있다 가는 사람, 보리차만 마시고 가는 사람… 어떤 사람들은 괜히 와서 욕을 하고 가는 사람도 있어요. 별 이상한 사람 많아요."
"기차는 이제 아주 안 다니는 거예요?"
"몰라요. 기차가 다닌다고 뭐 나아지려나…"
여자의 대답은 기차가 다닌다고 별로 나아질 게 없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녀의 얘기 속에는 신탄리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모두 담겨 있었다. 신탄리에 관한 짧은 다큐멘터리 필름을 보는 듯했는데 그녀가 보여준 엔딩은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았다. 어둠이 일찍 찾아온다는 여자의 말에 작별 인사를 하고 다방을 나섰다.
철도 건널목을 건너 마을로 들어섰다. 어둠이 내려 앉기 시작한 마을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입구 마을 안내판에는 39개의 식당 이름이 적혀 있었지만 문을 연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양평손두부식당, 고대산산이초, 금수강산, 통일식당, 할머니민박, 고대산민박, 신탄식당, 기차길식당… 가을 단풍이 한창이라 전국의 명산에 등산객이 몰린다는데... 왜 이곳엔 등산객도 보이지 않는 걸까.
기차가 끊긴 다음부터는 등산객들도 잘 안 온다는 다방 여자의 말이 생각났다. 경원선의 또 다른 역인 신망리역에서 만났던 할아버지의 말도 떠올랐다. "여긴 사람 살 데가 못 돼." 신망리역, 초성리역 등 경원선의 다른 인근 지역의 형편도 신탄리역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지난 60년간 철저하게 소외되었던 접경지역 주민들의 삶이 너무 애잔했다. 2021년 완공 예정인 동두천-연천역 전철화로 이들 마을들은 어떤 변화를 겪게 될까.
고대산 자연휴양림과 역고드름
가을에 이어 12월 다시 신탄리를 찾았다. 눈 내린 신탄리는 가을보다 더 적막했다. 하루를 고대산 자연휴양림에서 묵고 이튿날 고대산 초입까지 올라가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