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에 있었던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조선학부 건물. 김단야는 이 대학 조선학부장으로 근무했다.
독립기념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5개월 남짓 공부한 뒤 외국노동자 출판부에서 일하며 아들을 낳은 주세죽과 김단야는 지하운동 시절에 비하면 훨씬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봄날은 너무 짧았다. 1936년 8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한국학부가 폐지되면서 김단야는 가족이 살던 관사를 비워달라는 독촉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 무렵, 러시아 전역에서 스탈린의 숙청이 진행 중이었다. 대대적 숙청이 이어지던 1937~1938년 2년간 내무인민위원부 비밀경찰에 체포된 사람은 158만 명, 처형으로 목숨을 잃은 이는 68만 명이 넘는 공포의 시대였다. 숙청의 광풍은 러시아에 망명한 외국인 혁명가들도 비껴가지 않았다.
갑작스레 폐지된 동방노력자공산대학 한국학부장 김단야는 내무인민위원부로부터 '인민의 적' 혐의를 받았다. 그가 '일제의 밀정'이 아니냐는 것으로, 그것은 단순히 동료로부터 의심받는 차원이 아니라 숙청을 담당하는 국가기관의 서슬 푸른 추궁이었다.
'스탈린의 광기'에 '반혁명'으로 희생되다
내무인민위원부는 1929년 조공 재건 운동을 위해 국내에 잠입해 활동할 때 적지 않은 동료들은 모두 체포되었는데 그만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던 점, 그가 혁명가후원회 업무를 맡긴 김한(1887~1934, 2005 독립장)이 밀정으로 처형됐는데, 당시 왜 그의 정체를 몰랐던가 등을 캐어물었다.
김단야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이를 증명하는 데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코민테른 동방부의 임직원들이 구명에 나섰고, 이들의 제안에 따라 김단야는 장문의 해명서를 써서 제출하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김단야는 자신을 혁명 일선으로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고, 코민테른은 내무인민위원부에 조공의 당면 사업을 위해 김단야를 현지 파견 대표로 선임하고자 그 집행 여부를 물었는데, 회신은 김단야를 조선에 파견하는 것은 권고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로써 여러 달 동안 이어진 구명운동은 최종적으로 실패했다.
그리고 1937년 9월, 언론인 출신의 사회주의자로 모스크바에 망명해 있던 이성태가 코민테른에 낸 의견서는 낭떠러지에 버티고 선 김단야를 떠밀어버렸다. 그는 김단야가 화요파 출신의 종파주의자이고 가까운 동료 중에는 밀정으로 전락한 자로 김찬, 조봉암, 박헌영, 김한, 고명자 등을 지목했다. 김단야는 검거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체포되지 않은 극소수에 속했고, 두세 차례 체포됐을 때도 다른 동료들보다 현저히 낮은 형량을 받고 풀려났다고 했다.(이상 임경석, '스탈린 광기에 희생된 혁명가',<한겨레21> 1194호 참조)
그리고 1937년 11월 5일, 소련 내무인민위원부는 김단야를 전격 체포했다. 김단야는 마침내 조공 지도자에서 '일제의 밀정'으로 내몰린 것이다. 1938년 2월, 소련 최고 인민 재판소 군사 법정은 그에게 "일제 첩보기관의 밀정이며 반혁명 폭동과 반혁명 테러활동을 목적으로 한 조직의 지도자로서 1급 범죄자"라는 판결을 내리고 당일 바로 김단야를 처형했다.
향년 38세. 흔히 김단야는 '조선의 가타야마 센(片山潛)'이라고 불리는데, 가타야마 센은 일본 사회주의 제1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코민테른 상임집행위원으로 소련에 머물면서 일본의 공산주의 운동을 지도했고, 1933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그러나 그는 김단야와 달리 처형된 것은 아니었다.
비극은 김단야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아내인 주세죽의 삶도 만리타국 모스크바에서 내동댕이쳐졌다. 백일을 갓 지난 아들 김비딸리이는 곧 죽었고, 보육원에서 자란, 박헌영과 낳은 아홉 살 난 딸 비비안나는 1933년부터 이바노브에 있는 정치적 망명자를 위한 국제어린이집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제1급 범죄자'의 아내로 체포된 주세죽은 두 달여 심문 끝에 사회적 위험분자로 지목돼 5년간 카자흐스탄으로 유배됐다. 그는 유배지에서 피혁공장 개찰원과 협동조합에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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