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치
이날치
지난밤 '범 내려오는' 꿈을 꾸었다. 요즘 들어 이날치 밴드의 곡 <범 내려온다>를 하도 많이 들었더니, 급기야 꿈에서까지 나타난 것이다. 유튜브의 뮤직비디오를 족히 100번은 더 반복해 본 것 같다. 중독성으로 치면, 방탄소년단이나 블랙핑크 저리 가라다.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는 말. 이 곡을 두고 하는 이야기다. 지겹기는커녕 5분 30초라는 짧지 않은 영상을 볼 때마다 넋을 놓게 된다. 무시로 꺾이는 창법과 몸이 막대기처럼 움직이는 이른바 '좀비 춤'은 그냥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신난다.
노랫말을 정확히 알아들을 수도 없고, 춤을 흉내 내기도 쉽지 않다. 세션이라고 해 봐야 드럼과 베이스 기타 두 대가 전부지만, 여느 밴드 못지않게 현란하며 풍성하다. 여느 밴드처럼 여러 악기가 뒤를 받쳤다면, 소리꾼 네 명의 목소리가 되레 묻혔을 것 같다.
대신 춤이 세션이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춤사위가 목소리에 흥을 돋운다. 동작의 경쾌한 박자감이 마치 북소리처럼 느껴진다. 그들이 직접 반주도 하고 노래를 하는 것처럼 착각할 정도다. 그래서, 팀 이름을 중의적이라는 의미의 앰비규어스(Ambiguous)로 명명한 걸까.
사실상 앰비규어스가 이날치고, 이날치가 앰비규어스다. 흔히 판소리의 3요소로 창, 아니리, 발림을 든다. 팬들의 호응이 아니리라면, 그들의 춤은 소리꾼과 팬을 이어주는 발림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들로 인해 곡이 완성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날치'를 찾아서
그중에도 압권은 '이날치'라는 범상치 않은 밴드 이름이다. 한국사 교사로서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처음엔 이날치가 사람 이름인지도 몰랐다. 판소리의 느낌이 나도록 입에 착착 들러붙게 만든 신조어인 줄로 알았다. 마치 정확한 어원과 의미를 알 수 없는 '아리랑'처럼 말이다.
밴드의 인터뷰 기사를 보고서야 알았다. 조선 후기 8대 명창으로, 본명이 경숙(敬淑)이라는 것과 줄타기 등의 기예가 뛰어나 날래다는 뜻으로 '날치'로 불렸다는 사실 등을 전해 들었다. 처음 밴드가 결성됐을 때, 구성원 7명이 투표를 해서 이름을 정했다는 후문까지도.
왜 하필이면 이날치였을까. 곡의 장르와 분위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명명으로, 팬들 모두가 '신의 한 수'였다고 평가한다. 한 시대를 풍미한 하고 많은 명창 중에 그를 주목한 까닭이 없진 않을 것이다. 그들을 인터뷰한 기사는 차고도 넘치지만, 그 어디에서도 이를 밝힌 적은 없다.
그래서, 직접 이날치의 남다른 생애를 찾아 공부해 보기로 했다. 이 또한 최근에 안 사실이지만, 그가 태어나 자라고 득음한 뒤 명성을 얻은 곳이 지금 내가 사는 곳에서 자동차로 20분 남짓의 거리다. 이렇듯 가까운 곳인데도, 그의 이름조차 몰랐다는 게 면구할 뿐이다.
그에 대한 기록은 소략하다. 인터넷에서 그의 이름은 쉽게 검색이 되지만, 내용은 채 A4 반쪽 분량도 안 된다. 그나마 생애에 대한 기록이 사뭇 달라 어떤 게 사실에 부합하는지 확인하기도 쉽지 않다. 소리꾼으로서 출세한 뒤의 활동 내용 정도가 일치할 뿐이다.
부잣집 종노릇을 해야 했던 미천한 신분이어서다. 반상의 구별이 엄격했던 봉건제 사회에서 그의 이름과 출생지, 생몰년 등이 남아 있다는 게 외려 다행이다. 당시 최고 권력자인 흥선대원군 앞에서 재능을 뽐낼 정도로 명성을 얻었기에 그나마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날치는 1820년생으로 알려져 있다. 공교롭게도, 그를 한양으로 불러올렸다는 흥선대원군과 동갑내기다. 세상을 등진 때도 흥선대원군보다 고작 6년 앞선 1892년이다. 말하자면, 흥선대원군과 그는 각각 정치와 소리로 19세기 한 시대를 풍미한 셈이다.
그는 담양 수북에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나이 오십이 넘어 한양 출입을 하기 전까지 고향 인근 전라도 땅을 벗어난 적이 없다. 종살이를 했던 곳은 창평이고, 남사당패에 들어가 득음을 한 곳은 광주이며, 스승을 찾아다니며 소리를 배운 곳은 고부와 보성이었다.
오래전 영화 <서편제>가 주목을 받고, 판소리 등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커진 이후에야 비로소 조선 후기 명창들의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흔히 전라도 판소리 창법의 두 갈래라는 동편제와 서편제라는 용어도 그 이후 대중화됐다. 이날치라는 이름도 그 틈에 알려졌다.
그즈음 그가 태어난 고향, 전남 담양군 수북면 대방리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워낙 외진 곳이어서 부러 발품을 팔아 찾아가야 겨우 만날 수 있다. 명색이 '국창(國唱)'이라는 찬사가 이름 앞에 붙어 있지만, 변변한 안내판 하나 없어 가까이 다가가 내용을 읽기 전까지는 무슨 자연보호 표지석인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