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마음건강 지원2020년 서울시는 심리·정서적 문제를 겪는 청년 2000여명을 대상으로 심층 심리상담을 무료로 지원했다.
서울시
청년을 대변하다 ① : 정의할 수 없는 것을 대변하는 공허함
청년을 대변하겠다는 메시지는 모순이다. 왜냐하면 청년이라는 정체성은 하나로 고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A와 B라는 사람을 예시로 들어보겠다. A는 서울 출신, 서울 거주, 인서울 4년제 대학 졸업, 직장인 노동자, 30세 남성, 이성애자다. A라는 한 사람에 대해서도 수많은 정체성이 있다. B는 전남 광양 출신, 부산 거주, 고졸, 자영업자, 30세 여성, 동성애자다. A와 B는 모두 청년이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이 같은 정체성으로 묶일 수 있는가? 아니다. 성별도 다르고, 학벌도 다르고, 성정체성도 다르고, 출신 지역도 다르고, 거주 지역도 다르다. A와 B만 놓고 얘기해서 그렇지 A부터 Z까지 각자 가지는 정체성이 다 다르다. 세대론의 맹점이다.
청년이란 정체성이 하나일 수 없으니 청년을 대변한다는 말 자체도 성립될 수 없다. 청년 중엔 대학생도 있고 대학생이 아닌 사람도 있고, 남성도 있고 여성도 있고, 동성애자도 있고 이성애자도 있다. 노동자인 청년도 있고 노동자가 아닌 청년도 있고, 도시에 사는 청년도 있고 농촌에 사는 청년도 있다. 부모와 함께 사는 청년이 있고 독립해서 자취하는 청년이 있고, 부동산을 가진 청년이 있고 부동산이 없는 청년이 있다. 나열하기에 따라 수없이 많은 정체성이 혼합된 것이 청년이라는 세대다. 이러니 청년을 대변한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도대체 누구를 대변하겠다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다른 세대도 마찬가지다. 특정 세대를 대변하겠다는 말은 의미 없는 레토릭일 뿐이다.
청년을 대변한다는 말이 성립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청년에 대한 기준조차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청년의 사전적 의미는 '신체적ㆍ정신적으로 한창 성장하거나 무르익은 시기에 있는 사람'이다. 신체적으로 어느 정도 성장해야 무르익은 시기인가? 정신적인 성장은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신체적으론 성장했는데 정신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사람은 청년인가 아닌가? 사전적 의미부터가 '대강'의 개념이다. 대강 사람을 볼 때 어느 정도 성장했다 싶으면 청년인 거다.
사전적 의미부터 모호하니 청년의 기준은 법마다 다르고, 법마다 기준이 다르니 정부 지원사업이나 조례에서도 기준이 제각각이다. 정당들마다 청년에 대한 기준이 다른 것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애초에 명확한 기준이 없었으니. 청년이라는 세대를 규정할 수 없다면 청년을 대변하는 정치라는 말 자체가 성립되기 어렵다. 그저 '나이'일 뿐이다. 청년이라는 말은 2030세대의 어떤 특징을 설명해주지도 않는다.
청년을 대변하겠다는 말은 국민을 대변하겠다는 말과 같다. 둘 다 정확하게 메시지를 던지는 것 같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없고, 아무데나 끌어서 쓰기 좋은 표현이다. 박상훈 박사는 <청와대 정부>에서 "민주주의자는 '국민'과 '여론'이라는 말을 늘 의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청년도 마찬가지다.
청년을 대변하다 ② : 공허함을 넘어 현실을 가리는 말
청년을 대변하겠다는 말은 그저 공허함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청년들의 개별적인 정체성이 묻히고 나름의 필요한 조치들이 경시하는 악영향을 가져온다. 청년들이 겪는 삶이 저마다 다르다. 때문에 일괄적인 범위 내에 묶일 수 없다. 그럼에도 무분별하게 청년을 대변한다는 말이 남용되다보니 청년을 특정한 집단처럼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보니 본질적인 문제는 묻히고 단순히 청년들에만 국한된 문제로 여겨지기도 한다.
등록금 인하 정책의 경우가 그렇다. 물론 많은 청년들이 학자금 문제로 힘들어하고 있다. 필자도 얼마 전 퇴직금으로 학자금 대출을 겨우 다 갚았을 정도다. 대학생들의 학자금 문제는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졸업 후에도 계속해서 발목을 잡기 때문에 반드시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하지만 이 문제를 단순히 청년문제로 국한시키면 뒤에 있는 사회구조가 보이지 않는다. 간단히 짚어 봐도 등록금 문제는 대학을 나와야만 적정 수준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학벌사회, 불평등을 근본적으로 심화시키는 교육, 취업을 하고도 학자금 상환 때문에 돈을 모으지 못해 결혼이 늦어지고 그 영향으로 아이를 낳는 시기가 늦어지는 것 등 수많은 문제들이 엮여있다.
하지만 이를 "청년들이 힘들어하고 있으니 등록금을 낮춰야한다"는 논의에 국한한다면 그 이면에 있는 사회구조적 문제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청년을 대변하겠다면서 "등록금 문제로 청년들이 힘들어하니 등록금을 낮추겠다"고 해버리면 대학에 가지 않은 청년들은 상대적으로 소외된다. 청년이라는 개념을 자의적으로 대학에 진학한 사람들로만 한정을 시켜놓으니 청년을 위한 등록금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말은 동시에 대학에 가지 않은 나머지 29.6%의 대학 미진학자를 주변부로 여기는 불평등을 야기한다.
비슷한 사례로 주거문제가 있다. 청년들이 주로 살고 있는 반지하, 원룸, 고시원, 옥탑방 등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말의 이면엔 한국사회의 부동산 문제와 1인 주거에 대한 문제가 있다. 하지만 이를 단순히 청년들의 주거문제로 국한지어서 말하는 순간 본질적인 문제는 가려진다.
청년을 구체적으로 호명하며 대상화해야
청년을 대변하겠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청년들만이 겪고 있는 특별한 문제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함께 겪고 있는 문제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들을 대변하겠다고 나서는 자가 있다면 그는 청년들을 대상으로 정치 마케팅을 펼치는 장사치에 불과하다. 자신 있게 청년들을 호명하지만 청년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거짓말쟁이일 뿐이다. 기성정치 싫다면서 '국민' 한 마디로 퉁쳐버리는 기성 정치인들과 뭐가 다른가.
청년정치인들이 보다 더 구체적인 대상을 호명해줬으면 좋겠다. "성소수자 청년을 대변하겠다", "청년 여성들을 위한 정치를 펼치겠다", "무주택자 청년들에게 희망의 미래를 열겠다", "청년 노동자의 편에 서겠다"처럼 말이다. 뭉뚱그려서 대상화한 청년보다 더 명확한 메시지를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1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