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당 제8차 대회 4일차 회의서 발언하는 김정은지난 8일 평양에서 노동당 제8차 대회 4일차 회의가 열렸다고 조선중앙통신이 9일 보도했다. 사진은 이날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발언하는 모습. 2021.1.9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2011년 김정일 사망 뒤에 노동당은 그를 '영원한 총비서'로 추존했다. 이듬해 개정된 <조선노동당 규약>은 그를 "조선로동당의 영원한 총비서이시고 조선로동당과 조선인민의 영원한 수령"이라고 선언했다.
이는 김일성 사망 4년 뒤인 1998년에 개정된 북한 헌법에서 김일성을 '영원한 주석'으로 추존한 일을 연상케 했다. '영원한 주석'은 현행 헌법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김일성 사후로 그 누구도 주석 타이틀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주석 타이틀을 사용하지 않는 관행은 아직 유지되는 반면, 총비서 타이틀을 사용하지 않는 관행은 이번 제8차 당대회에서 깨졌다. 노동당은 지난 9일 규약 개정을 통해 '총비서'직을 재설치하고, 다음날 김정은을 노동당 총비서로 추대했다.
비워두겠다던 총비서직을 김정은에게 부여한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조치이지만, 그런 논리적 모순을 따질 만큼 북한 사정이 여유롭지 않을 뿐 아니라 김정은의 위상을 더 높일 새로운 타이틀을 찾아내지 못했음을 뜻하는 것일 수 있다.
위기감과 자신감
이번 당대회에서 북한은 대남·대미 정책에서는 일단 유보적 입장을 표명했다. 남한과 미국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그에 발맞춰 대응하겠다는 식의 방침을 정리했다.
그러면서도 핵무기와 관련해서는 긴장감을 고조시키고자 했다. 소형·경량 전술핵무기를 개발하고 초대형 핵탄두 생산을 계속하며 사정거리 1만5000킬로미터 범위에 대한 핵 공격 능력을 고도화하겠다고 선언하는 한편, 핵잠수함과 극초음속 무기개발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북의 핵 보유를 점점 더 현실로 받아들이는 국제사회를 상대로 핵 이슈 긴장감을 예전 수준으로 높이겠다는 의지를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대남·대미 정책에서 새로운 방침이 나오지 않았다. 핵무기·핵잠수함의 경우에는, 향후 그렇게 하겠다는 것일 뿐 지금 당장 뭔가를 보여준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당대회를 개최한 일차적 동기는 대외관계가 아니라 내부 사정에 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해 이번 대회에서 두드러진 것은, 미국과 유엔의 경제제재, 코로나19, 자연재해 등으로 위기가 고조되는 속에서 경제 등 내치에 비중을 두고 군대의 위상을 더 떨어트리며 노동당의 비중을 한층 제고시켰다는 사실이다.
대외관계에서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고 김여정·최선희 같은 대남 라인이 뒤로 물러선 데다가 군대의 위상마저 더 낮아진 것은 '지금은 국내 문제에 더 집중할 때'라는 국내 여론을 반영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김정일을 영원한 총비서로 받들겠다던 서약을 뒤로 하고 김정은을 총비서에 추대한 것은 보다 힘 있는 리더십으로 내부적 과제들에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최근까지 북한 정권과 대결 구도를 형성했던 적대 진영의 두 정권은 코로나19 및 그로 인한 민심이반 때문에 맥없이 무너졌다. 재선이 무난할 것 같았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그냥 나가느냐 망신당하고 나가느냐'를 걱정해야 할 처지에 놓였고, 건재한 듯 했던 아베 신조 총리는 지난 9월 건강 문제를 내세우며 퇴진했다. 적대 진영에서 발생한 이 같은 리더십 혼란 역시 북한 정권의 위기감을 고조시키고 김정은의 리더십 강화를 추동하는 동력 중 하나가 됐다고 볼 수 있다.
동시에, 어느 정도의 자신감도 밑바탕에 깔린 것으로 보인다. 지난 5일 개회사에서 김정은 본인은 "국가경제발전 5개년 전략수행기간이 지난해까지 끝났지만, 내세웠던 목표는 거의 모든 부문에서 엄청나게 미달"됐다며 경제 부진을 자인했지만, 이 같은 경제적 실패가 민심이반을 초래할 정도는 아닌 듯하다.
버락 오마마 행정부의 대북정책인 '전략적 인내'가 2016년 1월 제4차 핵실험을 계기로 고강도 대북 제재로 돌변해 트럼프 행정부로 계승된 상태에서 엎친 데 덮치는 격으로 코로나와 수재까지 겹쳤지만, 북한 경제를 그럭저럭 끌고 왔다는 자신감이 김정은의 총비서 추대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을 총비서로 추대할 때 나온 10일자 '조선로동당 제8차 대회 결정서'는 "짧은 력사적 기간에 우리 공화국의 종합적 국력과 지위를 최상의 경지에 올려세우는 민족사상 가장 특기할 업적을 이룩"했다고 한 뒤 "국가 핵무력 완성의 력사적 대업을 빛나게 실현하시어 우리 조국을 세계적인 군사강국으로 전변"시켰다고 추대 사유를 소개했다.
또 다른 추대 사유는 경제적 성과다. "김정은 동지께서는 나라의 경제 전반을 정비·보강하고 인민경제의 자립화·현대화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현명하게 이끄시"었다고 평가했다. 11일자 <노동신문>에 게재된 리일환의 '김정은 총비서 추대사'에서도 동일한 사유로 거론됐다. 이번 대회에서 노동당 중앙위원으로 선임되면서 김정은과 최룡해·리병철·김덕훈·김재룡에 이어 여섯 번째로 언급된 리일환은 추대 사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제국주의련합세력의 군사적 위협이 날로 증대되고 장기적인 미국의 핵위협과 맞서야 하는 정치·군사 정세로부터 출발한 혁명의 간절한 요구를 깊이 통찰하시고 제국주의자들의 집요한 경제봉쇄 속에서도 짧은 기간 내에 굴함 없이 국가 핵무력 완성의 력사적 대업을 끝끝내 실현하시었으며 (중략)
세계적인 보건위기를 초래할 악성 전염병의 위험성을 명철하게 내다보시고 초(初)시기부터 세상이 알지 못하는 선제적인 초특급 비상방역태세를 확고히 견지하도록 하시었으며 련이어 들이닥친 엄청난 자연재해를 가시기 위한 전당적·전국가적인 피해복구대전을 승리에로 이끄시여 (후략)"
애초의 경제계획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자립경제 유지, NK 방역, 재해 복구' 등을 근거로 김정은의 내치 성과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그런 뒤 리일환은 "첩첩이 가로놓인 도전과 장애를 정면 돌파하며 강국 건설의 웅대한 목표를 향하여 더 큰 걸음을 내짚어야 할 지금과 같은 중대한 시기에"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당면한 도전과 장애를 정면 돌파하자면 김정은에게 힘을 더 실어줘야 한다는 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위와 같이 적대진영의 행정부 수반들이 코로나 와중에 퇴장하고 있다는 위기감과 더불어, 노동당 결정서와 리일환 추도사에 드러난 자신감 등이 바탕이 되어 북한 지도부가 김정은의 위상을 높일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총비서 김정은'의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