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11일 오전 10시 청와대 본관 1층 로비에서 신년사를 발표하기 위해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청와대 제공
부동산 투기는 불로소득의 존재 때문에 발생한다. 근본 원인이 부동산 불로소득이므로 대책의 초점도 당연히 불로소득 차단에 맞춰져야 한다. 부동산 불로소득 차단에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토지보유세다. 양도소득세나 각종 규제도 부동산 불로소득 발생을 억제할 수는 있지만 토지보유세만큼은 아니며 매물 잠김 효과 등의 부작용을 수반하기도 한다. 토지보유세는 부동산 소유자가 차지할 지대소득을 줄여서 가격을 안정시키는 작용을 한다. 다른 말로 하면, 부동산 소유자의 보유비용을 높여서 투기적 보유를 억제하고 가격을 안정시킨다.
토지보유세는 세금으로서도 매우 우수하다는 사실이 익히 알려져 있다. 중립성, 경제성, 투명성, 공평성 등 조세원칙의 여러 기준으로 평가할 때 제대로 설계된 토지보유세는 모든 기준에서 A+의 평가를 받는다.
이처럼 세금으로서 매우 우수하고 부동산 투기 근절에도 강한 효력을 발휘하는 토지보유세를 강화하는 정책은 그냥 추진해 버리면 될 듯한데, 그게 그리 간단치 않은 모양이다. 문재인 정부가 24번이나 부동산 대책을 발표하며 부동산 시장을 안정시키려고 안간힘을 쓰면서도 굳이 보유세 강화 정책만은 피하려고 애써온 것을 생각해보라.
필자는 <오마이뉴스>를 비롯한 여러 언론 매체를 통해 문재인 정부가 보유세 강화 정책에 미온적임을 지적하며 이를 제대로 추진할 것을 촉구해 왔다. 최근에는 문재인 정부 임기 중에 이 정책을 추진하기가 어려워졌음을 고려해 보유세 강화의 장기 목표를 제시하고 정책 추진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일이라도 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지난 3년 8개월 동안 최선의 부동산 투기 근절책을 의식적으로 외면해온 문재인 정부 정책 입안자들을 생각하면 답답함을 넘어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지만, 최근에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는 사실 정도는 그들도 다 알았을 텐데, 왜 보유세 강화를 안 하려고 그렇게 애를 쓴 걸까? 도대체 무슨 사정이 있었던 걸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고(故) 김기원 교수가 역설했던 '세금의 정치학'이 마음에 떠올랐다. 생전에 진보 세력의 무능함을 질타했던 김 교수는 진보 세력이 증세의 당위성을 주장하면서도 목표를 성취하는 데 필요한 전략·전술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증세가 말처럼 쉽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가 부동산 정책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행보를 보인 것은 자기들만의 '세금의 정치학'이 작용한 탓이 아닐까?
정면 돌파의 정치학 vs. 회피의 정치학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는 보유세를 대하는 태도에서 큰 차이가 있다. 노무현 정부는 부동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보유세 강화 정책을 밀어붙였던 반면, 문재인 정부는 이를 어떻게든 회피하려고 했다.
노무현 정부는 한국 사회에서 부동산이 근본 문제라는 인식을 깔고서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했다. 노무현 대통령부터 2003년 11월 "강남이 불패라면 대통령도 불패로 간다"라고 하고, 2006년 4월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완화되거나 후퇴하는 일이 없도록 직접 챙기겠다"라고 할 정도로 부동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기득권층이 '세금폭탄론'을 동원해 보유세 강화 정책을 엄청나게 공격했고 그것이 마침내 일반 국민의 마음까지 사로잡았음에도, 노무현 정부는 끝까지 정책의 기조를 지켜냈다.
반면, 문재인 정부는 출범 직전 굳이 기자회견을 열어 보유세를 올릴 계획이 없다고 천명하는가 하면, 출범 후에는 재정개혁특별위원회라는 이상한 조직을 만들어 보유세 정책의 책임을 민간에 떠넘기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부동산 시장이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진 2019년 말에 와서야 마지못해 종합부동산세 세율을 어느 정도 올렸지만, 이는 3주택 이상 소유자 또는 조정대상지역 2주택 이상 소유자에 한정되었다. 2주택 이하 소유자에 대해서는 약간의 세율 인상이 있었을 뿐이다.
토지에 대해서는 나대지 등에 부과하는 종합합산 토지의 세율을 찔끔 인상했을 뿐, 빌딩 부속 토지 등에 부과하는 별도합산 토지의 세율은 이명박 정부 때와 똑같이 그대로 두었다. 게다가 지방 보유세인 재산세는 일절 손대지 않았다.
2020년 들어서도 부동산 시장이 안정되지 않자 마침내 문재인 정부는 7.10 대책을 발표해 종합부동산세 최고세율을 4%에서 6%로 인상하기로 했다(이 세율은 과표 전체가 아니라 최고 과표 구간에만 적용하는 세율임에 유의하라). 언론에서는 정부가 부동산 소유자에게 엄청난 세금폭탄을 퍼부으려 한다고 호들갑을 떨었으나 그 세율을 적용받을 대상자는 20명이 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보유세 정책만을 놓고 보면, 노무현 정부는 '정면 돌파의 정치학'을, 문재인 정부는 '회피의 정치학' 구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 정책 입안자들이 회피의 정치학에 빠진 데는 종부세 트라우마가 작용했다고도 하고, 재집권을 최고 목표로 지지율 유지에 방해가 되는 정책에는 손을 대지 않는 '지지율 집착증'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도 한다.
문재인 정부 인사들이 노무현 정부 때의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서 부동산 정책의 기조를 잡은 것을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가 좌고우면하지 않고 보유세 강화를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정책 추진 방법상에 오류가 있었다고 해서 아예 정책 자체를 회피하는 것은 치명적인 오류다.
정권 출범 초기에 보유세 정책의 기조를 소수의 다주택자에 한정한 핀셋 증세로 잡고는 그 정책으로 부동산 투기가 잡히지 않자 정부는 핀셋 증세의 강도를 점점 높여가는 행태를 보였다. 이를 정당화하려고 '1주택자 = 실수요자, 다주택자 = 투기꾼'이라는 거짓 프레임을 만들어 정책 발표 때마다 설파하기도 했다.
하지만 부동산값이 잡히기는커녕 전국 곳곳이 '풍선효과'로 들썩이는 참담한 결과가 초래됐을 뿐이다. 24번의 부동산 대책이 실패로 돌아갔음이 명백해지자, 최근에는 대통령을 비롯해 주요 정책 담당자들이 주택공급 확대를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투기 열풍의 와중에서 추진하는 공급 확대 정책은 부동산값을 안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투기를 유발하기가 쉽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또한 번지수를 잘못 잡은 경우라고 해야 한다.
시계추를 왼쪽 끝까지 당겼다가 놓으면 가운데 가서 서지 않고 오른쪽으로 한참 가버리는 현상을 생각하면, 정면 돌파의 정치학을 반성하다가 회피의 정치학에 빠져버린 것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간다. 그러나 정면 돌파의 정치학과 회피의 정치학 사이에 숨은 샛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놓쳐버렸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아래에서는 보유세 강화라는 오래된 숙제를 해결하면서 조세저항도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숨은 샛길, 즉 '개혁적 현실주의의 정치학'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를 계기로 관심 있는 지식인 사이에 세금의 정치학에 관한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숨은 길: 개혁적 현실주의의 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