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진초등학교 학교 연혁부산진보통학교의 초창기 연혁을 볼 수 있는 소중한 수기 자료이다.
부산진초등학교 『학교연혁지』
박재혁이 부산육영학교에 언제 입학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07년 5월 국채보상운동 당시에 학동(學童)으로 최천택, 김영주와 같이 다닌 것은 확실하다. 당시의 교장은 김상하(金庠河)였으며 학교는 중학교 과정에 초등의 학동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중학부 학생은 몇 명 없었다. 학동이 70여 명이었다. 당시 교감은 김채균(金采均)이었다. 교감은 원래 지역 상인으로 학문에 관심이 없었으나, 수년 전에 교육사상이 자연 발생하여 학교 경비 수백 환(圜)을 부담하며 제반 사무를 열심히 실행하여 학교 상황이 크게 일어나고 학생도 날로 증가하여 칭찬이 자자하였다. 당시 부산지역에서 학교를 육성하기 위한 기부 활동이 크게 일어났다. 1907년 10월 <부산면 육영학교 청조금(請助金) 기부록>의 명단을 보면 금릉위 박영효⋅전 법부대신 이하영⋅전 감리 이무영⋅동래부윤 김교헌⋅세무관 정기두⋅전감역 박갑록⋅전교관 김경백⋅전자옥 등 전⋅현직 관료뿐만 아니라 일반인을 포함한 550여 명과 46개의 계중(契中)이 참여하였다. 이때 교장은 3원, 교감은 20원을 기부하였다. 그만큼 교육에 대한 열의가 높았다. 그 열의는 계몽을 통한 국권회복을 하기 위함이다.
당시 육영학교의 창가를 보면, "… 슬프다 우리 대한독립 2자 어디 가고, 독립이여. 독립이여. 우리 동포 양식일세. 가련토다 우리 동포 양식 없이 어이살꼬, 찿아가세. 찾아가세. 독립 독립 찾아가세. …"에서 보듯 독립에 대한 열망이 드높았다. 이런 독립의 의지를 학생들은 자연 학습하였다. 하지만 1909년 척식회사는 부산 육영학교에 주었던 우세(牛稅)의 절반을 학교 운영비로 주어 "학교 경비를 득탈하고 교육을 방해하는 일은 온 세계에 없는 일"이라며 주민들의 원망을 받았다.
오택은 1908년 4월 1일 부산진좌천학교(개성학교 분교) 1학년 입학하였다. 친척과 동네 노인들을 청하여 단발식을 거행하였다. 선조에 고유(告諭)하고 북향(北向)사배(四拜)하여 구식(舊式) 상관식(上冠式, 갓 쓰기)과 같이 단발하니 십여년동안 애호하던 일척(一尺) 삼촌(三寸)의 긴 머리털이 땅에 떨어질 때 말이 눈물을 흘렸다. 즉시 학교모자를 쓰고 까만 두루마기에 양화(洋靴)를 신고 활보하였다. 그는 좌천학교를 1년 남짓 다녔다. 아마 한약방을 하는 집에서 일본어를 배움으로 장사에 도움이 되리라 보고 좌천학교에 보냈을 것으로 짐작된다.
좌천학교는 1909년 좌천동 유지 서석주가 설립한 학교였다. 1910년 교장 서석주, 교감 김종규, 교사 이상운이 있었다. 사립좌천학교는 1911년 부산진공립보통학교에 흡수되었다. 오택은 2학년 때 부산부윤 한치유(韓致愈)의 각면 유세(遊說)에 의하여 설립된 동래 사상면 괘법에 있는 사립명진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 당시 100여 명의 학생이 있었는데 20세 이상이었고 3~4학년은 중학 정도의 속성교육이 되었다. 교원은 대개 경성에서 초빙하고 체조는 군대식이었다.
가을에 동래군 28개 학교 연합대운동회가 동래 만년대에서 열려 수천 명의 학생이 보무당당하게 열지어 들어오니 신흥 국민이 된 느낌이 들었다. 1910년 8월 당시 교장은 괘법동의 지양윤(池楊潤), 교감은 감전동의 조우식(趙宇植)이었고, 교사인 지양윤, 조우식, 양윤백 등이 열심히 교육하고 가산을 투자하여 학생이 백여 명에 이르렀다. 모라동 박기채, 괘법동의 백낙호가 각 1백환을 기부하여 권학 하였다. 명진학교는 1910년 11월 교직원 8명, 학생 75명에 1년 경비가 94만5000원이 들었다. 사립좌천학교는 교직원 6명, 학생 112명, 1년 경비 51만 원이 소요되었다. 사립육영보통학교는 교직원 6명, 학생 255명, 1년 경비는 69만6000원이었다. 사립학교를 경영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학생 1인당 1년 평균 10원이 필요했다.
최천택은 1902년 7살 때 육영제 서당을 다녔다. 1907년 부산육영학교 학동으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다. 그가 부산진공립보통학교 4년제를 1912년 3월에 졸업하였기 때문에 정규 교육과정의 학교는 1908년 4월에 입학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서당에 다니다 부산육영학교에 입학을 하여 1909년 사립부산진보통학교, 1911년 부산진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 대한제국에서 일제 식민지로의 변모 과정에서 시대상을 반영하듯이 학교 이름도 바뀌었다. 최천택은 1912년 3월 부산진공립보통학교를 4학년 과정을 1회로 졸업하였다. 박재혁과 김영주 역시 최천택과 비슷한 과정을 밟았다. 다만 박재혁은 최천택과 나이가 1살 많아 1911년 3월 사립부산진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김영주는 최천택보다 1년 뒤인 1913년 3월에 부산진공립보통학교를 2회로 졸업하였다.
현재 부산진초등학교의 『학교연혁지(단기 4240년 기)』에 따르면, 1907년 9월 7일 사립육영학교로 개교하고 교장은 김성원(金聲遠)이었다. 그는 시종원 시종(侍從院侍從)을 지낸 인물로 1907년 부산면 육영학교 청조금 3백 원을 기부하였는데 당시 최고액이었다. 1908년 6월 송희용(宋熙用) 교장이 부임을 하였다. 1909년(융희3) 3월 사립육영학교 1회 졸업생은 5명이었다. 졸업명부를 보면, 신경호(辛敬昊, 26세), 박종엽(朴鍾曄, 17세, 부산공립상업학교 1회, 국채보상 朴宗엽), 김용태(金容泰, 19세, 부산공립상업학교 1회), 박기필(朴琪弼, 20세, 부산공립상업학교 1회, 국채보상 朴基弼), 이규식(李圭植, 16세)이었다.
1909년 4월 사립(부산진)보통학교로 인가를 받고 6월에 보조지정 보통학교가 되었다. 부산진부인회의 후원으로 생긴 여학교인 양정숙(養貞塾)이 1908년 5월 문을 열고 부인회 기금으로 교실을 신축하였다. 이 양정숙이 1909년 9월 부산진보통학교의 분교장이 되었다. 1910년 3월 제1회 사립부산진보통학교 졸업식을 거행한다. 졸업생은 10명이나, 남아 있는 졸업명부에는 4명이다. 송석무(宋錫武, 22세), 홍재선(洪在先, 17세), 신상문(申相文, 20세), 정기조(鄭基朝, 18세)이다. 졸업생 송석무는 1912년 경성고등보통학교 임시 교원양성소 속성과를 졸업하고, 1912년부터 14년까지 부산진공보 부훈도를 지내고, 그 후 양산군 하북보통학교 훈도로 있다가 1935년부터 39년까지 양산군 웅상면장을 지냈다.
1908년 신채호의 『이순신전』과 『을지문덕전』이 나왔다. 정공단의 아이들은 신채호의 을지문덕을 읽으며 아이들은 이 나라가 이 지경이 된 것은 힘이 없기 때문이요, 결단력과 지도력이 있는 영웅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했다. 지금 우리나라에 필요한 영웅은 나약한 선비가 아니라, 바로 지혜와 힘이 있고 애국심에 불타는 을지문덕 같은 장군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