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무황제 어진황제가 된 고종은 조선을 근대화하려 하지만 일제의 침략을 막지는 못했다. 그는 외교로 대한제국의 주권을 회복하려했지만 열강은 도와주지 않았다. 황제의 복장은 근대화의 상징이다
대한황실문화원
광무 황제, 통감부에 저항하다
인간의 삶이 단순하지 않듯이 역사의 전개 역시 그러하다. 하나의 사건이 아닌 여러 복합적 사건이 얽혀서 시대의 역사를 만든다. 인간은 하나 혹은 복합적 사실에 영향을 받는다. 을사늑약 이후 유생들은 의병의 길을 걸었고, 친일 개화인들은 근대화를 추구하였다. 유생이나 개화인 모두 세계 조류에 대해 기본적 인식은 그들이 접한 사람과 서적에 제한되어있었다. 우리는 우리 경험의 한계 안의 사람들이다.
근대적 시대에 만국공법을 보검처럼 여겨졌다. 유생들은 국제사회가 공의(公議)에 의해 침략국을 응징하는 춘추대의적 입장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각국 공사관에 탄원과 방문을 하였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서구 열강은 제국주의적 입장에서 이해타산에 따라 인식하고 행동했다. 약소국은 제국주의 국가의 먹잇감에 불과했다. 만국공법은 식민지 국가에는 달콤한 사탕이지만 실상은 그림의 떡이었다.
고종 역시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황제에 올랐다. 만국공법의 나라를 선포하였다. 근대적 국제사회로 진입을 위해 각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며 대등한 국가로 대접받기를 원했다. 청나라. 벨기에, 덴마크,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미국 등등과 외교적 동반자가 되었다. 각국 공사관이 설립되었다. 국제조약에 가입하였다. 광무황제는 대한제국에 문제가 발생하면 국제사회가 유사시에 한반도 문제에 개입할 것을 기대하였다. 국제주의적 외교 전략을 펼쳤다. 일본은 몰라도 다른 나라는 만국공법에 따라 모든 일을 처리할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대한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고 외교권이 박탈되었다. 썰물 빠지듯이 미국 공사관 철수에서 시작하여 각국의 외교관들이 철수하였다. 대한제국의 해외공관은 폐쇄되고 외교관들은 해외에 망명했다. 을사늑약은 대한제국의 무능력의 산물이었다. 열강들은 조만간 대한제국이 보호국에서 일본에 병합되어 식민지가 될 것이라 예견했다. 단지 시간의 문제일 뿐이었다. 광무황제는 끊임없이 특사나 밀서를 통해 대한제국의 자주독립권을 다른 나라에 넘겨주지 않았으며, 일본의 침탈에 의해 강요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탈리아, 벨기에, 청나라 등의 국가원수에게 친서를 전달하며 대한제국의 의견을 전달하였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마음대로 요리하기 위해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대행하기 위한 통감부는 각국 공사관의 철수 이후 대한제국의 내정을 장악하고 식민지화의 기초를 닦았다. 보호국의 자치를 생각했던 개화 지식인의 뒤통수를 때리며, 일제는 내정간섭을 넘어 내정을 장악하였다. 심지어 광무황제가 외국인을 만나는 것까지 감시할 권한을 공식적으로 가졌다.
이토 히로부미 부임 이후 광무황제는 자신의 주권 침탈 행위에 대해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궁내부의 권력 행사를 통해 저항했다. 정부 행정에 대해 간섭하고, 때론 직접 행정권을 행사하고, 외국인과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또 친일 내각을 불신임하고, 의병에게 자금을 지원하고, 특히 이토가 서울을 비우는 경우 더 황제는 자신의 주권을 행사했다. 결국 통감부는 황제에게 '궁금숙청(宮禁肅淸, 대궐 안에 잡인 출입 금지)'을 요구했다. 황제는 궁궐에 유폐 상태에 처했다. 할 수 있는 일은 밀서를 보내고 특사를 파견하는 일이었다. 고종은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열강을 향해 끊임없이 대한제국 문제에 개입해 줄 것을 호소했고, 가능한 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알리려고 노력했다.
1907년 5월 22일, 전국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이 한창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광무황제의 폐위를 주장하는 이완용을 참정대신(총리대신)으로 발탁했다. 이완용 내각이 들어섰다. 당시 대한자강회, 서북학회 등 계몽운동 단체들은 친일 내각 타도를 주장하며 정부를 공격했다. 인민들은 국채보상운동을 통해 배일운동에 앞장섰다. 이완용은 주미공사관 참찬관을 지낸 친미파였다가 아관파천 때에는 친러파였다가 을사늑약 전후로 친일파로 변신했다. 그는 일본과 한국이 거리가 가깝고, 중국의 속국이었을 때보다 이득이 많고 한국과 병합을 추진하지 않는 일본의 보호국인 상태에서 실력을 양성하면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광무황제는 철종의 부마였던 박영효를 귀국시켜 궁내부에서 자신의 안위를 지키라고 한다. 비록 친일 개화파였지만 그는 왕실의 한국의 자주권과 근대화를 여전히 바라고 있었다. 왕권 강화를 통해 주권을 회복하려는 황제와 신권의 강화를 통해 과거 양반지배 체제를 꿈꾸는 관료들이 대결하는 상황이었다. 일제는 황제의 권력을 견제하며 내정을 점차 장악해나갔다. 황제와 대신, 통감부는 각기 다른 방향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헤이그 특사 파견과 황제의 폐위
1907년 6월 광무황제는 정사(正使)에 전 의정부참찬 이상설(李相卨), 부사(副使)에 전 평리원 검사 이준(李儁)과 주로한국공사관(駐露韓國公使館) 참서관(參書官) 이위종(李瑋鍾) 등 3명을 헤이그평화회의에 파견한다. 일본의 불법 행위를 각국 위원들에게 알리고 세계가 모두 대한제국의 고난을 알고 만국공법(公法)에 따라 공의(公議)로서 대한제국의 국권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당한 일제의 보호국인 대한제국 특사들은 회의 참가 자격 자체가 없었다. 주요 국가의 위원들도 특사의 면담을 거절하였다. 그런 와중에 특사단은 『만국평화회의보』에 일본의 국제법 위반 행위를 폭로하였다. 을사늑약은 황제의 동의가 없었고 무력을 행사하고 대한제국의 법과 관습을 위반했다고 지적했다. 이위종의 '대한제국 특사단 호소'가 신문에 보도되었다. 7월 14일(음) 갑작스레 특사 중 한 명인 이준이 순국하였다.
광무황제의 헤이그 특사 파견은 실패하였다. 외교적으로 중립국을 선택하고 열강에 외교적으로 호소하였던 전략은 순진했다. 춘추대의보다 힘의 세계가 국제사회였다. 특히 일본의 보호국인 대한제국의 주권이 이미 침탈당한 상황이라 국제사회에서 큰 호소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표면적으로 황제의 특사 파견은 큰 소득을 거두지 못하고 일제의 한국 침략을 가속화시킨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세계 열강에 대한제국이 주권 회복을 위해 분투하고 있으며 일제의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최초로 알렸다는 데 그 역사적 의미가 있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계기로 광무황제의 폐위를 밀어붙였다.
내각의 이완용과 송병준이 7월 16일 내각회의에서 황제폐위를 결정했다. 이완용이 이를 알리자 황제는 "짐은 죽어도 양위할 수 없다"라고 거절하고 오히려 박영효를 궁내부 대신으로 임명했다. 7월 18일 황제의 거절로 궁내부 대신 박영효를 부르지만, 병을 칭하며 응하지 않았다. 결국 새벽 5시 황제는 황태자 대리의 조칙에 도장을 찍었다. 대한제국 10년 만의 일이었다. 7월 20일 9시 황제의 양위식에는 광무황제도 융희황제(순종)도 참석하지 않아 환관이 대신하였다. 환관이 황제의 자리 용상에 앉아 양위식을 한 것이다. 광무황제는 12세에 왕위에 오른 지 44년 만에 퇴위했다.
7월 20일 반일 단체인 동우회 회원들이 이완용 집을 불태웠다. 가재도구 및 고서적 등이 불타 10만 원 상당의 재산 피해를 줬다. 이때부터 이완용은 친일 매국노의 대명사가 되었다. 광무 황제가 양위하자 궁내부 대신 박영효, 시종원경 이도재, 전 홍문관 학 남정철 등은 평양에서 올라온 시위대 제2연대의 지원으로 7월 20일, 황제의 양위식 때 황제의 양위를 결정한 신하들을 전부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궁내부 대신 박영효, 시종원경 이도재, 군무국 과원 참령 이갑, 시종무관 정령 어담, 정위 임재덕 및 홍문관 학사 남정철은 체포되어 구속되었다. 21일 오후 10시경 전 내부대신 이지용, 이근택, 이근호의 저택은 결사회원에 의해 불에 타 없어졌다. 그만큼 신민의 분노는 컸다.
순종은 7월 25일 박영효를 궁내부 특진관 칙임관 1등에 임명하였다. 8월 22일 황태자 대리예식에 불참한 박영효, 이도재, 남정철을 각각 곤장 80대에 처하였다 박영효는 이완용의 상소로 8월 23일 보안법 위반의 죄목으로 다시 경무청에 구금당했다가 8월 27일 유배형을 선고받고 제주도에 1년간 유배된다. 그는 1908년 말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서울 상경이 금지된다. 제주도 유배에 동행한 김홍조와 같이 이 시절 그는 부산과 언양 작천정에서 시름을 달랬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부산 개성학교 출신의 송태관은 순종 즉위 직후인 1907년 7월 23일 봉상사 제조에 임명된다. 하지만 8월 9일 경시청에 갇히고 곧바로 해임된다. 9월 7일에 보안법 위반으로 송태관, 이우명, 김대진 3명은 1년간 전라남도 진도 외의 거주 금지를 받았다. 이들 3명은 고종 양위사건과 관련하여 상관인 궁내부 대신 박영효 또는 시종원경 이도재의 부하였기에 고종 양위에 반대한 측에 있었기에 귀양을 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송태관은 일본 유학시절 개화파인 박영효와 동향인 울산의 김홍조와 같이 교류했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송태관은 2년 5개월의 짧은 관료 생활이었지만 출세 가도를 달렸고 자신의 역량을 나름대로 발휘했다. 그의 일본어 실력과 고종 황실의 신임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볼 수 있다. 송태관은 이후 울산, 부산에서 사업을 하기 시작하여 능통한 일본어 구사 능력과 궁내부 근무 경력을 바탕으로 부를 축적한다.
광무황제 양위 반대에 군대가 참여한 것은 군대해산의 빌미가 되었다. 7월 31일 이토는 융희황제로부터 군대해산의 조직을 얻어 마침내 군대를 해산한다. 근대국가를 꿈꾸며 부국강병을 꿈꾸었던 대한제국은 군대 없는 나라가 되었다. 군대해산에 맞서 병사들은 서울에서 시가전을 벌였다. 한국군 200명 내외가 사망하고 500여 명이 포로가 되고, 일본군 60여 명이 사상당했다. 8월 이후 해산군인들은 의병이 되었다.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였다. 1907년 11월 전국 양반 의병장을 중심으로 조직도 13도 연합부대가 서울 진공을 추진했다. 하지만 충의(忠義)보다 효(孝)를 더 중시하는 양반이었다.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 사망으로 귀가한 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지도부가 붕괴하였다.
훈련받은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유생 의병들과 확연히 달랐다. 의병은 인민 의병이 중심이 되었다. 해산군인, 포수, 평민이 중심이 된 의병들은 1908년부터 1909년까지 2년 동안 가장 격렬한 전투를 하였다. 특히 전라도 의병의 활약이 대단했다. 일본인 통치를 중단시키기 위해 일본인 농장, 관공서, 금융조합, 우편소 등을 공격하였다. 일제는 1909년 하반기부터 남한대토벌 작전을 벌이면서 의병부대를 궤멸시켰다. 황현은 "사방을 그물 치듯 해놓고 촌락을 수색하고 집집마다 뒤져서 조금이라도 혐의가 있으면 죽였다. 그래서 행인의 발길이 끊기고 이웃과의 연락이 두절되었다. 의병들은 삼삼오오 도망하여 흩어졌으나 몸을 감출 데가 없어 강자는 돌출하여 싸우다 죽었고, 약자는 기어 도망가다가 칼을 맞았다"라고 기록하였다. 이때 사망한 의병이 1만 6천여 명, 부상자가 3만 6천여 명에 달했다. 살아남은 의병은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일제 식민지 시기 독립군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