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물 가방들을 보며 다들 한껏 들뜬 기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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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마니또는 하필 남편이었다. 평생 남의 선물을 직접 사 본 적이 별로 없는 남편은 선물을 잘 못 고른다. 사정을 아는 가족들은 제발 자기가 아빠의 마니또가 아니기를 바랐는데, 결국 나로 당첨되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신나 하며 마음껏 나에게 축하를 보냈다.
남편의 선물은 다이어리였다. 포장지까지 손수 쌌다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사실 다이어리는 남편 본인이 좋아하는 선물 아이템 중 하나일 뿐이다. 나에게는 별 감흥이 없는 물건이다. 늘 그런 식이다.
프리지어를 좋아하는 내게 남편은 자기가 좋아하는 장미를 준다. 치즈케이크를 좋아하는 내게 자기가 좋아하는 초코 케이크를 준다. 도대체 나를 위한 선물인지 본인이 즐길 선물인지 알 수가 없다. "에잇, 김샜다!"며 와인잔을 비우고, 도대체 "내가 좋아할 만한 선물"은 언제쯤이나 받을 수 있는 거냐고 다그칠 수밖에.
딸의 마니또는 아들이었다. 아들은 미처 포장을 못해서, 급한 김에 남편의 싸고 남은 포장지로 선물을 둘둘 말아 미적미적 딸에게 건넸다. 딸은 포장을 안 했다는 말을 들을 때부터 약간 풀 죽어 보였는데, 핑크색 천으로 만든 필통을 확인하고 나서 대뜸 따지기 시작했다.
"아니, 필통이 뭐야? 내가 필통 살 때마다 '너는 필통밖에 살 게 없냐?'며 구박한 사람이 누군데?"
아들은 연신 미안해하며, 그 날 오후에 대형서점 팬시문구 코너를 돌고 돌았지만 딱히 적당한 게 없더라는 변명을 했다. 그래도 아들은 부족한 성의를 채우려고 따로 도넛과 아이스크림까지 챙겨 왔으니 그나마 딸에게 위안이 되었다.
다행히 내가 준비한 선물, 전자기기 터치가 가능한 장갑은 아들이 마음에 들어했다. 날씨가 추웠던 며칠 전 같이 동네 일로 실외 촬영을 함께 나갔다가 손 시려하던 걸 보고 힌트를 얻었던 것이다. 게다가 앞으로 밖에서 촬영할 일이 많을 테니 유용하게 쓰일 것 같았다.
아들이 기뻐하며 당장 장갑을 끼고 핸드폰에 터치해 보는데, 웬걸 기대만큼 시원하게 화면이 잘 안 넘어간다. 답답한 마음에 장갑 끝까지 손가락을 밀어 넣어서 터치해 보라고 박박 우겨대는 날 보며 딸과 남편이 박장대소다. 메이드 인 차이나를 볼 때 알아봤어야 되는 건데... 보기에는 멀쩡한데 꼭 2% 아쉬운, 나를 닮은 선물을 했다.
마지막으로 딸의 큼지막한 짙은 남색 종이가방에 든 선물은 남편 것이었다. 아주 흡족해하며 포장을 뜯어보던 남편은 들어있던 무선 충전 마우스패드를 보고 급실망했다. 패드를 콘센트에 꼽고 위에 핸드폰을 놓으면 무선으로 충전이 되는 나름 신기술을 이용한 패드였다.
평소 신기술을 좋아하는 남편의 취향을 딱 맞춘 선물이면서도 마침 집에 마우스패드도 없던 차라 환영할 법도 한데, 남편의 반응이 영 좋지가 않았다. 종이가방이 너무 럭셔리해서 잔뜩 기대했는데 별 게 아니었다는 둥, 양복 한 벌은 든 줄 알았다는 둥 혼잣말이 끊이질 않는다. 자기가 좋아하는 다이어리를 내 선물이라고 준 건 그새 다 잊어버렸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