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보상운동 당시 발행된 의연금 영수증 1907년 4월 4일 강화군 하도면 장곶동 주민들이 64원을 냈다는 내용이다. 영수증 아래쪽 ‘yang’은 양기탁의 영문 사인이다.
국채보상기념사업회(대구)
대구의 국채보상운동은 1월 29일에 시작됐다. 서상돈(徐相敦, 1851~1913)이 "국채 일천삼백만 원을 갚지 못하면 장차 국토라도 팔아서 갚아야 하므로 이천만 동포가 담배를 석 달만 피우지 말고 그 대금으로 국채를 갚자"라고 제의함으로써 시작됐다. 서상돈은 자신부터 8백 원을 내놓았고, 회원들도 만장일치로 그의 제의에 찬동했다. 이에 광문사 사장으로 있던 김광제(金光濟, 1866~1920)가 당장 실시하라고 해 연죽(烟竹, 담뱃대)과 초리(草厘, 담뱃갑)을 없애고 석 달 사이 담뱃값 육십 전과 돈 십 원을 의손(義捐)하니 모든 사람이 사장의 결심에 찬성하며 각각 의연금을 출의했는데 당장 2천여 원이 모였다.
발기인인 서상돈은 독립협회의 회원, 만민공동회의 간부로서 자주독립‧자강(自强)‧민권(民權)을 위해 투쟁해 온 인사였다. 그리고 발기단체인 광문사도 황국협회의 기관지로서 보수적 성격을 지녔던 <시사총보(時事叢報)>의 후신이지만 당시의 애국계몽사상가들에 의해 새로이 발족한 출판사로 이곳에서 실학자의 저서를 간행했다.
대구광문사 내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는 국채보상취지서를 발표했다.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이유가 국민의 단결된 힘에 있었다고 했다. 군사에 감사대(敢死隊)가 있어 죽기를 결심하고 백성들은 패물을 팔며 군사 물자를 보태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일본의 5천만 민족의 하나하나가 열심혈성으로 충(忠)과 의(義)를 따랐기 때문에 승리한 것이다. 우리도 그와 같이하자고 했다. 황제의 신민에서 주권재민의 국민으로 변하는 운동의 신호탄이었다. 발기인의 취지서는 무능한 정부에 나라의 존망을 맡기지 말고 국민이 단결해 국채보상을 추진시켜 국가 주권과 국민주권을 찾자는 내용이었다. 즉 경제적 자주권을 회복해 민족의 생존권을 지키자는 운동이었다.
"신하와 백성된 자는 충성에 따르고 의(義)를 숭상하면 그 나라가 흥하고 그 백성이 편안하며, 충성하지 않고 의(義)가 없으면 곧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멸하게 된다. … 지금 국채 일천삼백만 원이 있으니 갚으면 나라가 보존되고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으로, 현재 국고에서 갚을 형편이 못 되니 2천만 민중으로 3개월 기한해 담배 피우는 것을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각 개인에게서 매월 20전씩을 거둔다면 일천삼백만 원을 모을 수 있으며, 만일 그 액수가 미달할 때는 일 원, 십 원, 백 원, 천 원의 특별 출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은 즉 모든 국민이 깨닫고 모두 일어나서 합심 단결해 국채를 갚아 국가의 위기를 구하라."
대구지방에서 발기됐던 국채보상운동은 드디어 서울에서 1907년 2월 22일 '국채보상기성회(國債報償期成會)'를 설립하고 회칙을 제정하는 등 구체적 실천 방략을 가지고 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국채보상운동 참가자들의 이름과 의연 액수는 제국신문, 만세보,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문, 경향신문에 명단형식으로 실려 있다. 의연자 명단은 2월 18일, 제국신문이 게재한 서울 정동의 고용인(雇人) 25명이 20전씩 의연한 것을 시작으로 해서 1908년 10월 31일 황성일보에 실린 황해도 봉산군 사원면의 156명을 끝으로 한다. 위의 5개 신문은 1907년 5월 14일 4,200여 명을 위시해 총 424일 동안 매일 평균 500여 명의 의연자 명단을 일반에 광고했다. 당시 신문에 보도된 의연 명단을 추정해 보면 총 31만9천여 명이 참여했다. 성인 남성 20명 중 1명이. 또 17가구 중 한 가구가 운동에 참여했다.
모금 총액은 186,164원이었다. 의연 운동은 1907년 2월 약 10일 동안 1,100여 명이 참여했고 3월에는 1만5천여 명, 이후 4, 5, 6, 7월에 각각 4만8천, 6만, 4만, 4만8천 명이 참여했다. 7월 중순부터 고종의 양위가 진행되고 31일 군대해산과 정미의병의 전개되는 등 급격한 정세변환을 거치면서 8월에 3만6천, 9월에 1만4천, 10월에 1만1천, 11월 7천, 12월 3천 명으로 의연자 명단 보도는 급속하게 감소하고 있다.
1907년 통감부의 통치로 나라의 재정이 파탄나는 지경에 이르자 신민들은 인민으로 국민으로, 나라의 주인으로서 국채를 갚는 운동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상인을 중심으로 한 운동이었지만 점차 노동자, 군인, 관리, 학생과 승려, 봇짐장수, 주부, 심지어 머슴, 기생, 백정, 걸인, 창부까지 전 국민이 참여해 재정적 독립을 꾀하자는 국권회복운동에 동참했다. 신민이 주인인 나라를 만드는 국민운동이었다.
심지어 일본인과 일본 유학생, 미국 동포들도 의연금과 의연서를 보냈다. 당시 신문들은 의연금 명단을 실어 언론들이 적극적으로 민족운동의 원동력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토 히로부미조차 "자기의 백 마디 말보다 신문의 한 마디가 한국인을 감동케 하는 힘이 크다."라고 까지 했다. 결국 일제는 국채보상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대한매일신보>의 배설과 양기탁을 배제하는 계략을 꾸미고 신문을 폐간하고 친일 신문인 <매일신보>로 바꾸는 한 계기가 됐다.
광무황제도 2월 26일 "신민이 나라를 근심해 이런 일을 하는데 짐이 어찌 모른 척하겠느냐"면서 궁중에서도 담배를 끊도록 했다. 하지만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는 농공상부의 잔치에 신민들은 분노의 돌을 던졌다. 황태자의 생일날인 춘추경절은 사회단체와 학교가 휴무하고 거리에는 태극기가 펄럭이며 거리에는 등을 달아 밝게 하고 경축가와 만세 천세를 부르며 대한제국의 무궁을 축원했다. 국가 경축일이었지만 주머니 쌈짓돈을 아끼며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는 신민들이 있는 반면에, 상공부에서 기생과 창부를 불러 함께 놀았다. 이것을 본 병사가 분노하며 "자갈돌이 비처럼 관의 유리창을 난타하며 분쇄하는" 돌팔매질을 했다. 실재 관료들과 부자들은 의연금에 동참을 적게 했다.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박재혁과 그의 친구들
남자들이 담배를 끊으면서 하는 운동에 여성들의 동참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여자도 나라의 주인임을 천명했다. 대구 남일동의 여성들은 "나라 위한 마음과 백성 된 도리에서 어찌 남녀가 다르리요."하며, "여자는 나라 백성이 아니냐."며 각자가 소지한 폐물을 가지고 참여하자고 주장하며,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각자의 패물 총 13냥 8돈쭝을 의연했다. 여성도 국민임을 선언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