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현 유해 환국대마도에서 영구가 부산항에 도착하자 하늘에 갑자기 쌍무지개가 떴다.
이의주 작(1976s)
이때 검은 구름이 덮여서 날이 어둡고 가랑비가 촉촉이 내려 쌍무지개가 동남쪽에 가로 걸려서 광채가 빛나더니, 영구를 안치한 뒤에 무지개는 사라지고 구름은 걷혀 비가 개니 한 점 먼지도 없었다. 항구에 가득했던 구경꾼들이 이상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영구는 상무사(商務社)에 모시고 빈소를 차렸다. 상여가 떠날 때까지 사람들이 통곡하는 사람이 주야로 끊이지 않았고, 학교의 생도와 여학생 70여 명,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모두 와서 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모두 땅을 치고 발을 구르며 친척처럼 슬퍼하였다. 상무사 회원이 "아! 선생이 살아 계실 적엔, 선생 한 분만이 산 것 아니라, 온 천하가 다 산 것이니 살아 계셔 보람이 있었고, 선생이 돌아가서는 선생 한 분만이 돌아간 것 아니라 온 천하가 다 죽은 듯하니 돌아가셔도 영원히 사신 것입니다. …" 하며 곡을 하였다.
수천 폭의 만사(挽詞)는 모두 군대(軍隊)를 시켜 들게 하였는데, 곳곳에서 통곡하며 전제를 올리는 자가 길을 메웠다. 기생 비봉(독립여학도 이가)은 제문을 지어 받쳤다. 면암의 기상을 칭송하고, 나라를 보호하고 그 치욕을 씻으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한탄하는 내용이었다. 제문은 '나도 충혼이 없을소냐. 세우리라. 세우리라. 우리 대한 독립관을 세우리라'라며 면암의 정신을 이어받을 것을 다짐하는 것으로 끝난다. 또 제문 뒤에는 '오호 통재라. 면암 선생 찬 정(贊政)공은 도덕도 장하시고 충절도 거룩하다'로 시작하는 시가(詩歌)가 붙어 있다. 또 기생 옥도ㆍ월매 등 동래부 기생들도 국문으로 제문을 지어 올렸고, 범어사(梵魚寺)의 주지 봉련(奉蓮)이 승려와 함께 불교식 제례를 하며 슬퍼하였다.
선비 최익현을 추모 길은 끝이 없어라
22일(을묘)에 성복(成服)하였고, 23일(병진)에 발인(發靷)하였다. 장례 행사와 짐꾼은 모두 상무사에서 전담하였다. 초량에서 구포까지 40리 이내였는데, 상여를 뒤따르는 사람이 더욱 많아지고 집마다 흰 기를 꽂아 지나는 곳마다 부녀들이 모두 곡하면서 맞이하였고, 노상에서 치전하는 사람이 서로 잇달아서 이날은 겨우 10리를 갔다.
다음날 30리를 가서 구포에 도착하였는데 여기는 동래(東萊)의 끝 경계이다. 초량의 세 과부는 부두에서부터 상여를 따라오다가, 구포(龜浦)에 이르자 머리에 전물을 이고 도보로 40리나 걸어와서, "대감의 제수(祭需)는 왜놈 차에 실어서는 안 되고, 제기도 왜놈 물건을 쓰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상무사 사람들은 구포에 와서 모두 매우 슬피 곡(哭)한 뒤에 돌아가고, 유진각은 시종 호상 하여 장례지인 정산(定山)에 이르러 돌아갔다.
부산항민들의 움직임에 동래부 참서관 최덕(崔悳)이 인력거를 타고 운구 행렬 앞으로 진격하여 가로막았다. 부산항민들이 반발하자 흥분하여 경무서에 연락해 여러 사람을 검거하였다. 부산항민들과 각 학교 학생들이 모두 등소(等訴)하여 즉시 석방했다. 동래 부윤 김교헌과 최덕이 조문하러 오자 상주가 최덕의 조문을 거절하였다. 동래부윤 김교헌은 훗날 대종교 2대 교주가 되었으며, 대종교를 부흥시키고 3・1만세 운동 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 총재에 교단(敎團)의 지도자인 서일(徐一)을 임명하는 등 적극적인 무력투쟁을 전개, 1920년 9월 청산리에서 김좌진(金佐鎭)이 대승리를 거두게 하였다. 1920년대 독립운동가 중에서 대종교인이 아닌 사람이 없을 정도로 세가 확장되었다. 민족주의 운동의 중심이었다.
이틀을 부산에서 머무르다가 상여가 출발하였는데, 학생들이 각지에 연락하였고, 거리에는 수만 장의 만장이 하늘을 가렸다. 운구는 부산진, 구포, 김해, 성주, 공주를 거쳐 15일 만에 본가가 있는 정산(定山)에 도착하였다. 그때 모은 만장(輓章)도 말 두 필에 싣고 갔으나 종일 10리 정도밖에 가지 못하였다. 영구차는 사람 때문에 하루 5km(10리) 밖에 갈 수 없었다.
정공단의 아이들도 최익현의 영구가 초량항에 들어오자 함께 가서 조문하고 울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눈물을 많이 흘린 적은 없었다. 최익현의 죽음은 한결같은 올곧은 정신 그 자체에 대한 추모였다. 아이들은 한 사람의 죽음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통곡하는 것을 태어나서 처음 보았다. 처음이었기에 그들은 어떻게 죽는 것이 올바른 죽음인지 생각하였다. 바른 소리와 바른 행동이 곧 올바른 인식에서 비롯됨을 깨달았다. 당시 부산 사상구 주례에 살던 오택(오재영)은 행상이 주례리 앞을 통과할 때 수천의 호상객이 따라오는 것을 보고 만장을 들고 구포까지 갔다. 다음날 서당 선생한테 최익현의 충성담을 들었다.
최익현의 영구가 상주에 도착한 후에는 일본인들이 고통을 느껴 상여 차를 버리고 기차에 영구를 실어 순식간에 그의 고향 집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상주 이하 300리 길에 이미 10일이나 소요되었다. 그리고 시골마다 애통해한 곡소리가 온 나라에 울려 퍼졌다. 부산에서 120km 떨어진 묏자리까지 꼬박 열흘이 걸렸다. 마치 국왕의 장례를 치르듯이 사람들은 통곡하였다. 장례식장에 수백 명의 선비가 모여들었다. 이토 히로부미도 만사를 지어 장례식장에 보냈다.
"대한 왕께 절을 올리며, 님을 위해 곡 하올제. 흐르는 눈물 바람에 날려 온 하늘에 비가 오네.…" 우국충절과 애국애족, 의리정신에 이토 역시 머리를 숙였다. 중국의 실권자 위안스카이(원세개) 역시 만사를 지어 보냈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님이 묻힐 그 산 하나 따로 없네"라며 애도하였다. 1907년 4월 초하루 면암의 무덤은 선산인 충남 논산군 노성면 지경리 무등산 아래 계좌언덕으로 이장되었다. 면암 최익현을 참배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일제는 무덤을 옮기게 하였다.
면암 최익현의 일평생은 바른 소리였다. 대원군을 정치에서 물러나게 하고, 개항과 통상은 망국의 길이라 비판했고, 친일 개화파와 을사오적을 능지처참하라고 끊임없이 주장하였다. 그 대상은 고종, 광무황제였다. 결국 그는 성리학적 입장의 존왕양이(尊王攘夷)에 있었다. 왕이 바로 서면 서양 오랑캐를 물리치고 나아가 나라의 자주권이 올바로 서서 침략 세력을 물리칠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왕은 스스로 서지 못했고 결국은 망국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망국은 실상 왕 때문이었다. 대한제국의 황제는 절대자요, 주권자였다. 모든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최익현은 왕이 주체가 되지 못함에 결국 의병봉기를 하였으나 그의 봉기는 지극히 미약했다. 그가 추구한 의리 정신은 죽음 이후에 선비 정신의 상징으로 남았다. 하지만 그는 성리학적 세계에 머물러 황제에게 의존하였다. 체제수호적인 입장에서 외세의 침략에 반대한 척사의 실천자가 최익현이었다. 반외세, 반침략의 깃발은 왜양일체론으로 죽을 때까지 놓지 않았던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