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갑신정변의 주역들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이들은 친일 의존적인 급진적 개화 운동을 펼쳤다. 이들은 이동인의 사상적 제자였다.
이병길
서울에 올라간 이동인은 김홍집을 만났다. 김홍집은 민비의 조카이자 당대의 세도가인 민영익(1860~1914)에게 이동인을 추천하였다. 당시 그는 개화를 옹호하였다. 자신이 수집한 괘종시계와 태엽시계를 선물로 주어 조정 대신들이 서양 문물을 접할 수 있도록 했고 램프, 잡화, 성냥 등을 구입해 들어와 왕실과 세도가들에게 선물했는데 이것이 서양과 일본문물의 첫 상륙이었다. 민영익은 이동인의 범상한 자질과 해박한 국제정세 등을 확인하고 고종에게 소개하였다. 고종 역시 이동인을 통해 일본과 서양의 소식을 들었으리라 짐작된다. 1895년(고종 32) 3월 29일 승려들이 도성 안에 들어오는 것을 단속하는 금령(禁令)을 해제하기 전에 고종은 이동인을 만났다. 이는 획기적인 사건이나 공식 역사에는 기록된 것이 없어 어떤 내용의 대화를 하였는지 알 수 없다. 고종은 이동인이 머리 기른 스님이기에 만났을 것이고, 조선의 개화 역시 왕의 관심사였다.
고종은 조선과 미국의 조약 체결을 위하여 중국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이동인을 청국의 일본주재 하여장(何如璋) 공사를 만날 밀사로 임명하였다. 고종은 밀서와 친필 서명 여행허가서를 주며 일본에 갈 것을 명령하였다.
1880년 10월 15일 이동인은 원산에서 머물며 엔신과 마에다 겐키치 일본 총영사 그리고 유대치와 함께 만나 정국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때 밀사가 와서 조선 정부의 논의를 이동인에게 보고하였다. 그런데 이 사실을 유대치는 일본 총영사에게 알리고 유대치와 논의하였다. 나중에는 탁정식(무불스님)도 합류한다. 정부의 기밀을 일본에 알려준 그의 행위는 매국일까? 아니면 정보 공유일까? 자국의 이익을 위한 협조일까?
이동인, 아시아의 연대를 옹호하다
11월 5일 일본 군함 천성함을 타고 이동인과 탁정식(무불)은 원산에서 일본으로 갔다. 열흘 후인 15일 도쿄에서 사토를 만나 영국 공사관에 머물렀다. 이동인은 러시아의 침공이 임박하였으니 영국 병력이 조선에 가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일까? 훗날 1885년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거문도를 점령한다. 아무튼 사토는 이동인에게 한국어를 배웠다. 주고받은 편지도 그런 내용이었다. 언어는 다른 나라를 이해하는 지름길이다. 7월 19일 사토는 이동인에게 영국과 조선의 외교 진행을 연결해주는 대리인(agent) 역할을 해주기 기대하는 편지를 보냈다. 단순한 한국어 선생이 아닌 외교관 역할 수행을 바란 것이다. 그만큼 이동인의 능력을 신뢰한 것이리라.
1880년 11월 16일 동경에서 열린 흥아회(興亞會) 월례회에 참석하였다. 흥아회는 서양 세력의 위압과 그들이 가하는 모욕을 극복하기 위하여 한·중·일 동양 삼국이 연대하자는 취지로 2월 13일 결성된 민간인 단체였다. 흥아회 창립 직후인 <흥아회보고』>제4집(1880년 5월)에는 이동인이 흥아회 회장 앞으로 보낸 '흥아회참(興亞會參)'이 실렸다. 이동인은 월회비 1엔이었던 당시 학자금 30금(金)을 출연하며 "대세를 한번 바로잡아 억만이 사는 우리 아시아를 이 시대의 종주(宗洲)로 만든다면 보탬이 되는" 역할을 하고자 하였다. 또 그는 "아시아가 쇠미하여 서양인들에게 굴욕을 당하는 것은 변통할 때 변통하지 못하기 때문"이기에 아시아인들이 연대하여 변통하여 실익을 구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는 아시아 연대를 통하여 서양 제국주의 세력과 맞서 동양의 위기를 극복하자는 흥아회의 취지에 동조하는 처지였다. 중국과 조선의 지식인이 동참했다.
이동인은 흥아회 회원이었다. 1880년에 일본에 가게 된 김홍집 일행은 흥아회의 초청을 받았는데 9월 5일 모임에 참가한 인물은 이조연, 윤웅렬, 강위 등이다. 그때 처음 이동인은 흥아회 모임에 참가하고 두 번째는 고종의 밀사 자격으로 일본에 갔을 때인 1880년 11월 18일이었다. 흥아회의 모임에 1881년 6월 23일 조사시찰단원이었던 홍영식, 어윤중 등이, 1881년 12월 12일 3차 수신사 수행원 현석운, 고영희 등이, 그리고 1882년 6월 21일 흥아회 모임에 김옥균, 서광범, 강위, 유길준 등 개화파가 참석하였다. 흥아회는 조선의 관료나 지식인, 개화파에게 아시아연대론을 전파하였다. 당시 조선은 아시아 연대를 부국강병을 위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분위기였다. "아시아 연대는 인종과 문물의 차이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같은 인종끼리 힘을 합쳐서 서양과 같은 근대화를 추진하여 서양 제국주의의 침투를 막아 주권을 수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880년대는 서구 열강의 동아시아 침략이 노골화되었던 시기였고, 특히 부동항을 확보하려는 러시아는 동아시아의 위협 대상이었다.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이 노골화되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였다. 연대의 중심 국가는 일본이었다. 아시아 공동 발전을 중시한 아시아연대론은 훗날 동양 평화론, 삼국 공영론, 대동아공영권 등의 주장으로 이어져 서양 열강에 대한 근대국가 일본의 국권 확립과 팽창을 위한 패권의 정치적 수사였음이 훗날 드러났다.
흥아회와 관련했던 조야신문(朝野新聞)의 스에히로 시게야스[末廣重慕]는 이동인을 "그 나라의 정체, 풍속을 물으니 언어가 명량(明亮)하고 조금도 응체함(막힘)이 없으며, 조선의 폐정을 상세히 나열하여 굳이 감추지 않으며, 구주 제국의 형세로부터 일본의 사정에도 환하게 아는 호걸"이라고 평가하였다. 1년 만에 일본어 숙달됨에 놀랐으며 키는 작고 안색이 기추(奇醜)하며 눈매가 괴이하다고 보았다.
1880년 11월 19일과 20일 이동인은 유대치와 함께 청국 공사 하여장(何如璋)을 만나 고종의 국서를 전달하며, 미국과의 수호조약 체결에 중국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무불(탁정식) 역시 한 달(12월 21일) 뒤 하여장을 만나 같은 요청을 하였다. 당시 이동인은 조미수호조약의 초안을 작성하였다. <조선책략>의 저자인 황준현을 만났다. "조선의 땅은 실로 아시아의 요충에 자리를 잡고 있어, 형세가 반드시 싸우는 바가 되니 조선이 위태로우면 극동의 형세가 날로 급해질 것이다. 러시아가 땅을 공략하고자 하면 반드시 조선으로부터가 시작일 것이다. 오늘날 조선의 책략은 러시아를 막는 일보다 더 급한 것이 없을 것이다. 러시아를 막는 책략은 무엇과 같은가? 중국과 친하고(친중국) 일본과 맺고(결일본), 미국과 연결함으로써(연미국) 자강을 도모할 따름이다"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조선책략>은 1880년 수신사 김홍집이 국제법 서적인 <만국공법>과 함께 일본에서 들여온 책이다. 이 책은 조선의 개화 정책 추진 과정의 필독서였다.
12월 1일 사토를 만나고 이동인은 12월 18일 부산으로 귀국하였다. 그때 무불은 일본 신호(神戶)에서 영국 영사인 아스톤(W.G.Aston)의 한국어 교사 역할을 하다가 동경에서 사토를 만나 한국어를 가르치고 서양 문물에 관심을 가지고 외국인과 교류를 하였다. 이동인이 일본에 있을 때 대원군은 이 사실을 알고 격노했고, 귀국하면 주살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일본의 우편선인 천세환(千歲丸)을 타고 이동인은 부산으로 귀국하였다. 하지만 왕의 특사라는 그의 말을 믿지 않은 동래부사에게 잡혀 투옥되었다. 유대치의 도움으로 1주일 만에 방면되어 12월 27일 서울로 출발하여 서울에 도착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그동안의 일을 보고하였다.
관료가 된 이동인, 그리고 행방불명
1881년 2월 25일 이동인은 사상의학(四象醫學)의 이제마(李濟馬, 1838~1900)와 함께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참모장(參謀長)으로 공식 임용된다. 승려 출신이 관료가 된 사실 자체가 혁명적인 일이었다. 하루아침에 공식적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소식은 일본 영사에게도 속속 보고되었다. 고종은 이동인에게 신식 군대 창설 이후 무기와 군함 도입을 위한 일을 맡겼다. 그는 일본 전문가로 인정받았다. 수시로 궁궐을 드나들며 국정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3월 9일 이원회와 함께 일본으로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3월 15일 전후 민영익의 집을 나선 이후 행방불명되었다. 오늘날까지 그의 죽음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가장 활발히 개화와 근대의 꽃을 피울 시기에 그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의 죽음은 조선과 개화파, 불교계의 커다란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이동인으로부터 한국어를 배웠던 사토는 이동인의 불명 이후인 1881년 8월 23일 이동인이 살아있기를 바라며 "그는 매우 흥미 있는 사람이다. 목숨만 부지할 수 있다면 틀림없이 자기 나라의 역사에 큰 자취를 남길 것이다"라고 기록하였다.
이동인이 사라진 후 그의 역할은 탁정식이 맡았다. 1881년 5월 어윤중 일행의 시사유람단을 이끌고 일본으로 갔으며, 자신의 역할이 끝나자 동경외국어학교 교사로 취직하며 머물었다. 1882년 4월 김옥균이 처음 일본을 방문하였을 때, 일본 실정을 매일 알려주었다. 그는 이동인의 행방을 알기 위해 영국 공사들의 금전적 도움까지 요청하기도 하였다. 탁정식은 1884년 신호(神戶)에서 급병으로 사망하였다. 김옥균이 장주(葬主)가 된 장례식장인 동경 아사쿠사(淺草)별원에 모인 사람이 영사를 비롯하여 200명이 넘었다.
개화는 중국의 양무운동과 일본의 문명화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양무운동은 중국의 전통과 서양의 과학기술을 융합하는 중체서용(中體西用)을 바탕으로 추진했다. 중국은 청일전쟁의 패배로 양무운동은 실패했다. 김홍집이 추구한 온건한 개화파의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과 같은 입장이었다. 조선은 청나라 양무운동과 같은 점진적 개화론자인 김홍집과 일본의 명치유신과 같은 급진적 개혁을 주장한 개화파인 김옥균 간의 갈등이 있었다. 고종은 이동인 실종의 배후에 대원군이 있다고 의심하였고, 김옥균은 김홍집 일파의 소행으로 짐작하였다. 김홍집과 김옥균 중에 누가 더 주체적 개화파였을까? 그것은 그들의 행적과 죽음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들은 일본으로 망명을 했다. 일본의 요구에 당당히 맞서며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뒷수습을 한 사람은 친청파인 김홍집이었다. 10년 뒤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1894년 갑오개혁의 적임자로 김홍집을 내세웠다. 조선 최후의 영의정이자 대한제국 초대 총리대신이 바로 김홍집이었다. 그 뒤 박영효가 총리대신 서리를 맡았으나 '민비 암살 음모혐의'로 체포의 위기가 오자, 1895년 7월 또 일본으로 도망을 갔다.
다시 김홍집이 총리대신으로 1895년 을미개혁을 수행하다가 1896년 2월 고종은 아관파천 후 김홍집 등 대신을 잡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김홍집은 일본 공사로 도망을 가지 않고 담담히 죽음을 맞이한다. 어윤중, 정병하도 그때 죽었다. 충분히 일본의 도움을 통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지만 김홍집은 그러지 않았다. "죽으면 죽었지 박영효와 같은 역적의 이름을 얻지 않겠다"라고 했다. 김홍집은 친일파였지만 박영효와 달리 주체적인 친일파였다. 한 나라의 왕이 대신을 때려잡아 죽이라는 것은 유교 국가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신을 죽이는 왕에게 어떤 관료들이 그의 명령을 따르겠는가? 고종은 무책임한 정치인이었다.
자주적 근대화의 길은 어려운가
1880년대는 조선이 자주적 주체적 근대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내부적으로 동학 농민운동을 통해 반봉건 반제국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일본은 아직 조선을 삼킬 힘이 없었고 청나라의 내정 간섭은 심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어떤 외국 군대도 조선에 주둔하지 않았다. 조선의 자주근대국가로의 길은 열려있던 시절이었다. 개화는 흥국이요 근대화, 문명화의 길이었다. 그 길을 먼저 갔던 나라가 누구였을까? 동양에서는 일본뿐이었다. "부정부패와 무능력으로 나태와 정체의 늪에 빠진 조선사회는 자율적 개혁이 불가능할 것으로 간주됐다. 조선사회의 개혁을 위해서는 외부 지도가 필수적이라는 시각이 일반적이었다. 비숍・헐버트・해밀턴 등 대한제국 전후의 사회 변화를 높이 평가한 서양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 러일전쟁 전후 일본의 조선 보호국화 의도가 드러나기 이전까지 대다수 서양인은 조선사회 개혁에서 일본의 개입과 간섭을 지지했다." 하지만 서양인들은 을사늑약 이전에 자주적 근대화의 가능성이 있었음도 인정하였다. 즉 조선이 주체적 역량에 의해 내재적 발전의 가능성 자체가 없었던 나라는 아니었다.
1895년 도성 출입이 해제되기 전까지 개항지역의 일본 불교 사찰은 승려와 일반인들이 일본 근대 문물을 접하고 정보를 획득하는 공간이었다. 부산의 일본 사찰에 통도사 스님인 이동인이 방문하였다. 일본어와 일본의 문물을 알게 됨으로 그는 조선의 개국과 개화와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지일파(知日派)인 동시에 친일파(親日派)가 된 당시의 일본 전문가였다. 개화를 위해 친일을 통해서 근대적 계몽과 부강을 꿈꾸었다. 그가 갈 수 있는 나라는 일본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에 있는 청국 공사관과 영국 공사관과 교류하며 국제적 안목을 길렀다. 이동인은 일본통인 동시에 국제통으로 그 당시에 가장 앞장선 인물이었다. 종교인으로 근대를 꿈꾸며 활동했던 사람이었다. 시대적 한계로 그는 일본의 조선 침략 야욕을 알지 못했던 한계가 있었다. 그는 일본을 형제국으로 인식하였다. 모든 사람은 그 시대의 사람이다.
서양의 세력이 점차 동양을 식민지로 지배하려는 시절. 개국의 준비가 되지 않은 조선은 고요한 아침을 맞아 잠이 들깬 상태였다. 하지만 아침이 되자마자 동양을 삼키려는 서양 제국주의자와 이제 막 기지개를 켜며 서양화의 대열에 들어가게 된 일본이 눈독을 들인 나라는 조선이었다. 조선은 서구와 일본의 개국 요구에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았다. 철저히 나라의 대문을 막았지만, 그 문은 곧 열리고 말았다. 뒤늦게 자주적 근대화를 부르짖었지만, 준비가 덜 된 상태였다. 먼저 선진적인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멀리 있었다. 결국은 청나라와 일본뿐이었다. 하지만 청에 대한 사대주의에서 벗어나려는 자주파는 일본의 근대 문물에 눈을 돌렸다. 그중에 가장 먼저 눈을 돌린 사람 중의 한 사람인 통도사 출신의 이동인 스님이었다. 일본을 왕래하며 가장 먼저 서양의 정보를 가장 먼저 수집하고 일본의 근대 문물을 수용하여 조선의 개화를 실현하려고 하였다. 그는 아시아의 연대를 통해 개국과 근대화를 추구하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를 통해 한국 침략의 준비는 끝났다. 을사늑약을 통해 그 발을 깊숙이 들이밀었다. 일본은 서양열강보다 더 혹독하게 한국 침탈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인민들의 깨어있는 의식이었다. 그러기위해 근대를 배우고 또 배워야 했다. 이제 일본을 통해 배울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박재혁과 그 친구들은 생각했다.
"대한제국 근대화의 칼자루를 일본이 아닌 한국이 잡고 해야 한다. 가장 가까운 상대일수록 더 경계하고 살펴야 한다. 이제까지의 개혁은 정부가 중심이었다면 제국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은 인민의 깨어있는 의식이다. 인민의 목소리는 국왕보다 더 위력적임을 만민공동회를 통해 대한제국의 전 지역으로 이미 퍼져있지 않은가? 왕의 시대는 이미 저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랐던 대한제국의 시대는 구본신참(舊本新參), '옛것을 근본으로 삼고 새것을 참고로 한다'라고 하였지만, 옛것은 이제 그 빛을 잃었다. 인민들은 개화의 물결 속에 파도를 치고 있었다. 황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었다. 인민이 근대의 주체임을 자각하는 시기였다. 을사늑약이 일어났지만, 아직도 일본을 우호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남아있었다.
**오마이뉴스, 폴리뉴스 동시 연재함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주변인과 시>, <주변인과 문학> 편집위원을 역임하고 현재 울산민예총(감사), 울산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부산・울산・양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질문의 산물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를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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