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군산의 병원, 치과, 한의원, 약국 신년광고(1936년 1월 ‘동아일보’)
조종안
군산 관련 자료와 보도 등 여러 기록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군산 지역 개업의 중 상당수가 의전(醫專)을 거치지 않고 의사면허를 취득한 것으로 나타난다. 1916년 군제의원을 개원한 정순문(鄭順文), 1932년 의사 시험에 합격한 김형식(金亨植), 1934년 치과의사 시험에 합격한 이민오(李敏五) 등이 대표적이다. 그중 김형식은 지경(대야) 지성당의원 원장과 옥구군 공의(公醫)를 겸하였다.
초등학교 진학률이 20%에도 미치지 못하던 1920~1930년대, 군산의 사회단체와 시민활동가들은 공교육을 받지 못한 무산 아동 교육을 위해 유치원, 야학, 청년학교 등을 설립하였다. 그들은 운영자금이 부족할 때면 동정음악회 개최나 통합 방식으로 유지하였다. 의료인도 다수 동참하였다. 후원회 가입, 위생검사, 성금 기탁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지원했던 것.
군산 의사들은 민간단체가 주관하는 '위생 강연회' 연사로 나서거나 보통학교(초등학교) 교의(校醫)를 맡기도 하였다. 1923년 4월 19일 저녁 동광청년회관에서 열린 강연회에는 권태형(안동의원 원장), 김세찬(옥산의원 의사), 현제국(세브란스의전 출신 의사) 등이 '전염병 발생 원인과 예방, 소독' 등을 주제로 강연을 펼쳐 큰 호응을 얻었다.
조선인 의료 인력이 크게 부족했던 일제강점기, 군산에서 병원을 개업한 의료인은 의학전문학교 출신 의학사(醫學士)보다 다양한 의료시설에서 조수 경력을 쌓아 의사 시험에 합격한 개업의가 훨씬 많았음을 알 수 있었다. 출신지도 서울을 비롯해 대구, 청주, 전북 고창, 충남 서천, 전남 목포 등 외지인이 많아 눈길을 끌었다.
그중 이장희(李章熙) 인제의원 원장, 강세형(姜世馨) 세창의원 원장, 권태형(權泰亨) 안동의원 원장 등의 흔적을 따라가 본다. 세 사람의 공통점은 당시로는 보기 드문 의학사 출신으로 광복 후에도 군산에서 병원을 운영했다는 것. 이들은 지역 주민들로부터 신망도 두터웠던 것으로 알려진다.
'산부인과의 거벽(巨擘)' 이장희 원장
이장희 원장은 대구 출신이다. 1933년 4월 대구의전(大邱醫專) 졸업하였다. 그해 나이 스물여섯. 그는 졸업과 동시에 군산도립의원에 발탁되어 산부인과 의사로 1936년 7월까지 진료에 임하였다. 임상 연구에 몰두하던 그는 그해(1936) 여름 군산도립의원을 사임하고 군산부 개복정(개복동)에 인제의원(仁濟醫院)을 개원한다(1934년 군산부 지도에서도 '인제의원' 확인됨).
이 원장은 1937년 봄부터 '군산부 촉탁의'를 겸하였다. 과거 신문들은 "이 원장은 '산부인과의 거벽'으로 성격은 중후하고 겸손한 전형적인 신사이다. 바쁜 중에도 학문 연구를 게을리하지 아니하며, 군산 의료계에서 가장 젊고 개업의 기간도 짧지만, 시민들로부터 신망이 두텁고 의술이 뛰어나 매일 환자가 답지하고 있다"고 전한다.
당시 개복정은 1정목(저지대), 2정목(고지대)으로 나뉘어 있었다. 1정목은 영화관 두 곳(군산극장, 희소관)에 악기점, 양복점, 사진관, 여관, 식당 등이 즐비한 상가였다. 그러나 2정목은 콩나물시루를 연상케 하는 수백 호의 토막집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데다가 변소 분뇨가 넘쳐흘러 통행인이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위생시설이 전무한 빈민촌이었다.
인제의원은 1정목과 2정목 경계(도로변)에 위치하였는데, 2정목에는 일찍이 '은근자 마을(윤락가)'이 조성되어 당시에는 '화류병'이라고 불리던 여러 질병을 앓던 환자도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윤락가는 광복 후에도 형태를 바꿔가며 영업하다가 개복동화재사건(2002년) 이후 사라졌다. 인제의원 역시 광복 후에도 존재했으나 언제 폐원했는지 정확한 연도를 확인할 수 없어 아쉬움으로 남는다.
소아과의 태두(泰斗), 강세형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