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회 여성인권영화제 '피움' 상영작 애니메이션 <영숙>(2020, 라정인 감독).
피움 누리집 갈무리
<영숙>은 라정인 감독이 만든 단편 애니메이션이다. 영숙은 친숙한 여성 이름이지만, 최초 여성 경제학자 '최영숙'은 잘 알려진 이름이 아니다. 내게도 낯설었는데, 그를 각인하게 된 계기는 2018년 출간된 책 <네 사랑 받기를 허락지 않는다>를 읽으면서였다.
이 책은 최영숙(1906~1932)의 짧은 일대기를 다루고 있었다. 조선 최초 고공농성자 강주룡의 경우 너무 짧은 생이어서 안타까웠는데 최영숙도 그러했고, 우연하게도 강주룡이 유명을 달리한 해와 같은 해에 그도 세상을 떠났다. 허망한 얘기지만, '그들이 좀 더 살아주었더라면' 하는 애석함을 떨치기 어렵다.
이화여고보(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23년, 최영숙이 담대한 포부를 안고 중국 남경으로 건너간 여정은 여는 독립운동가나 혁명가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특이한 행보는 중국 남경 명성학교 수학(修學) 후 그가 스웨덴으로 유학을 간 것이었다. 사회주의를 탐미했던 소수의 식민지 유학생이 건너갔던 혁명의 나라 러시아도 먼 나라겠지만, 더구나 스웨덴이라는 낯선 나라를 택해 유학을 떠났다니, 놀라웠다. 얼마나 먼 길이었을까. 게다가 전공한 학문이 경제학이었다니, 경탄이 흘러나왔고 문득 궁금해졌다. 그는 왜 경제학을 공부하겠다고 마음먹은 걸까?
그가 스웨덴으로 떠난 계기를 유추할 때 주로 언급되는 고리가 '엘렌 케이'다. 엘렌 케이는 스웨덴의 사상가로서, 1920년대 한중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서양 사상가 중 하나로 꼽혔다. 그에 관한 글은 1920년대 이후 조선 잡지에 꾸준히 실리고 있었고, 이를 통해 최영숙이 엘렌 케이를 깊이 흠모하게 되었다고 유추된다.
하지만 당시 소개되던 엘렌 케이에 관한 글이 육아나 연애 위주로 다루어진 것을 보면, 그가 스웨덴으로 가 경제학을 공부하게 된 경위가 모두 설명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가 상당히 사회주의에 심취해 있었고, 변혁을 추동할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경제, 특히 여성의 노동에 집중했다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중국 유학 후 한 자신의 생각을 흥사단을 통해 더욱 구체화했을 것이고, 이것이 스웨덴 유학을 결정한 이유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영숙>도 그가 경제학을 선택한 이유를 독립운동가 안창호와 연결시키고 있다. 안창호의 흥사단은 해외 젊은 유학생들에게 조선 독립을 독려하며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고, 중국에서 수학 중이던 최영숙이 흥사단의 일원으로 활동했던 점이 그와의 고리로 등장한다. 안창호가 독립과 더불어 조선의 미래를 담보할 중요한 화두로 교육과 식산을 중심에 둔 것은 부연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영화는 안창호의 '식산' 사상에 영향받은 최영숙이 경제를 중시하게 되었고, 특히 "소비자 의식을 일깨우고 조선 노동자를 위해 일하겠다"는 결심을 세우는 장면을 짧게 조명한다.
그가 조선으로 돌아와 "여성 문제나 경제학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는 인터뷰가 말해주듯이, 그는 여성과 경제 문제를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경제학사로 어려운 공부를 마치고 귀국했지만, 애석하게도 조선에 신여성 경제학도를 필요로 하는 곳은 없었다. 야채 파는 가게를 열고 '조선 여성 소비자 조합'을 태동시키며 사회운동가로 날갯짓을 시작하려 했지만, 그는 비상하지 못한다. 갑자기 쓰러진 뒤 27세의 나이로 요절했기 때문이다.
애도되지 못한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