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를 방문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지난 9월 30일(현지시간) 루이지 디 마이오 이탈리아 외무장관과 회담한 뒤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폼페이오 장관은 이 자리에서 이탈리아-중국 간 경제 협력 진전에 강한 우려의 뜻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로마 EPA=연합뉴스
지난 9월 30일 바티칸에서는 미국 대사관이 주최한 심포지엄이 열렸다. 이날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부 장관은 '윤리적 증언과 종교자유(Moral Witness and Religious Freedom)'에 대해 연설했는데, 여기서 그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독일에서 나치에 저항했던 베른하르트 리히텐베르크(Bernhard Lichtenberg) 신부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리히텐베르크 신부는 유대인과 나치에 희생된 사람들을 위해 공개적으로 기도했다가 체포된 인물로 그의 사례를 통해서 '모든 신앙의 지도자들이 그들의 (국가) 공동체에 거슬러 종교적 박해에 맞설 용기를 찾을 것'을 촉구한 것이다.
폼페이오는 또한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은 이라크와 북한, 쿠바에서 그들의 형제자매를 대변할 의무가 있다'면서 소위 종교자유 억압 국가들에 대해 종교 지도자들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요구했다. 더 나아가 중국의 종교탄압 문제까지 직접 겨냥한 폼페이오는 이런 맥락에서 종교 지도자들이 '사악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미·중 갈등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신냉전'의 상황에서 미국 정부의 당국자가 중국 정부와의 대화를 지속하고 있는 바티칸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외교적인 결례라고도 평가받는 폼페이오의 연설은 종교자유와 냉전적 대립이라는 해묵은 갈등의 주제를 다시 소환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실 종교와 냉전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20세기의 냉전이야말로 역사상 가장 중대한 종교전쟁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한다. 이들에게 냉전은 '신을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 간에 빚어진 전(全) 세계적 차원의 갈등'으로 규정되는데, 이 전쟁에서 그리스도교는 반공주의 무장을 위한 서구의 선전가들(Western Propagandists)과 정책 결정자들에게 전용(轉用)됐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교회의 지도자들 역시 이 정치적인 게임에서 단순한 희생양이 아니라 적극적인 참여자였다는 사실이 강조되기도 하는데, 그리스도교의 지도자들과 신자들 모두가 단순히 '선전'의 수취인에 머물지 않았으며, 국가가 냉전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이다.
서구의 문명과 그리스도교를 방어한다는 차원으로 보면, 20세기의 냉전은 그 전개에 있어서 십자군 전쟁과 비슷한 양상을 띠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사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등장하면서 시작된 냉전의 역사에서 교회는 스스로가 투철한 전사(戰士)로 싸웠던 경험이 있다.
이처럼 냉전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강조하는 학자들은 가톨릭교회의 역할에도 주목하는데, 바티칸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교회가 이미 오래전부터 세력을 확장하는 '무신론의 종교'에 대해 경계를 강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보편교회가 냉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과정에는 당시 반공주의 '편집증'에 사로잡혔던 미국 가톨릭교회의 역할이 있었다.
가톨릭교회의 반공주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가톨릭 복지 협회(National Catholic Welfare Conference, NCWC) 조직을 통해 정치적인 목소리를 높여왔던 미국 가톨릭의 주교들은 미·소가 연합군으로 싸웠던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루스벨트가 스탈린을 대하는 방식에 공개적으로 우려를 표현했었다.
특히 1944년 11월에 발표된 성명서에서 미국 주교들은 소련이 개인, 가정, 종교의 권리를 존중하도록 새로 구성될 유엔이 압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에게 전후의 평화는 명백히 그리스도교 원리에 기반을 두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듬해인 1945년 4월 15일, 얄타회담에서 소련에 양보가 이루어진 것에 불만을 가진 미국 가톨릭 복지 협회는 세계 평화에 관한 또 하나의 성명서를 냈다. 여기서 미국의 주교들은 전후 세계에서 중요한 이슈는 마르크스주의를 기반으로 한 전체주의 진영과 민주주의 진영 사이의 갈등이 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이들의 발표는 로마에 전달되어 4월 17일에 교황청 공식 기관지인 로세르바토레 로마노(L'Osservatore Romano)에 실렸다. 아직 미·소가 협력하던 제2차 세계대전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처럼 냉전의 기초가 놓이고 있던 것이다.
1945년 11월로 접어들면서 미국 주교들은 전후 미국의 외교정책을 바꾸기 위한 본격적인 노력을 시작한다. 특히 소련이 동유럽에서 인권과 법치를 무시한다고 비난했는데, 유럽에서 연합국이 승리한 지 불과 6개월, 일본에 승리한 지 3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소련에 대한 이 같은 전방위적 공격은 미국 정책에 급격한 변화를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처칠의 연설 '철의 장막'이 있기 4개월 전에, 미국의 가톨릭 주교들은 전후 세계에서 소련이 가진 악한 의도를 비난했고, 미국이 폴란드 민중에게 약속한 것을 지켜야 하며, 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등 동유럽에서 자행되는 종교 박해를 반대하는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교황은 그해 크리스마스 메시지에서 소련의 전체주의를 공격하는 미국 주교들의 입장을 따랐다. 여기서 교황은 국가 전체주의는 참되고 건전한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고, 참된 평화는 무신론적 공산주의에 의한 국제 질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교 민주주의 국제 질서에서 찾아질 수 있다고 선언한다.
해방과 함께 미군정의 통치를 받게 된 한국의 가톨릭교회는 이와 같은 미국 가톨릭의 반공주의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형성되고 있던 냉전의 대결에서 최전선을 맡게 된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이 땅의 교회는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단독정부 수립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대규모의 폭력적 갈등을 예감하면서도 분단을 지지했던 교회는 이후 벌어진 한국전쟁까지도 공산주의 세력에 대항하는 성전(聖戰)으로 이해했다. 그리스도교 진영이 상대를 악마화했던 냉전의 전장(戰場)에서 신앙인들은 가장 투철한 전사(戰士)로 참여했다.
냉전을 넘는 평화의 사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