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크리에이터 이지영 대표그녀가 카메라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다.
김윤지
서른아홉, 평생을 바쳐왔던 경력이 끝났다
이 대표는 대학 졸업 후, 13년간 보육교사로 일했다. 그러던 중, 서른아홉의 나이에 다니던 직장에서 계약 종료 통보를 받았다. 정규직이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목숨이 다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지만, 모든 게 결과적으로 '헛된 희망'이었다.
"그전에 직장을 옮길 때는 나의 선택이었지만, 이건 또 다른 의미인 거죠. 그때가 서른아홉이었거든요. 만감이 교차한 거죠. '경력이 단절되었구나', '내년에는 이제 마흔이 되는구나',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이인가보다'."
정규직 전환 하나만 바라보고 열심히 달려왔는데, 아무런 평가도 없이 계약이 끝나버렸다. 그녀는 이 경험이 큰 허탈감을 안겨줬다고 말했다. 과거 IMF로 인해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졌을 때도 특유의 긍정적인 성격을 바탕으로 일어났던 그녀였다. 하지만 그런 성격마저도 소용없었다. 이 대표는 이때 당시, 자신이 '무너져버렸다'고 회상했다.
나를 일으킨 것은 다름이 아닌 '가족'
그녀는 예상치 못한 현실에 괴로워, 모든 일에 손을 놓게 되었다고 한다. 직장과 학업을 병행하며 바쁘게 지냈을 때도 힘들지 않던 주변의 문제들이 그녀를 귀찮게 했다. 우울한 삶의 반복이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내가 사랑하는 아이들이 보고 있어.'
자신이 계속 힘겨워한다면 가족에게도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생각에 다시 일어선 것이다. 이지영 대표는 힘든 순간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를 묻자 바로 '가족'이라고 답했다. 그녀에게 가족은 큰 의미였다. 부유한 집은 아니었지만, 부모님은 항상 그녀가 세상을 살아가며 버틸 수 있도록 자신감과 정서적 풍요를 북돋아 주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림을 그리셨어요. 그림 그리는 사람이면, 밥을 잘 못 먹고 살잖아요. 그런데 항상 저희 데리고 나가서 사계절을 보게 하셨어요. '바깥 냄새를 맡아봐라, 얼마나 좋으냐' 그러셨지요. 그 당시에는 그게 그렇게 귀찮았는데, 어른이 되니까 그게 다 (제 안에) 남아 있더라고요."
그녀의 말투·행동 등에서 묻어 나오는 밝은 에너지는 성장 과정에서 가족의 사랑을 받은 덕분이었다. 그녀가 받은 사랑만큼, 아이들에게 주고 싶은 것도 많았기에 더욱 힘을 내어 새 출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인생 2막이 시작되다
이지영 대표는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 겪은 계약 종료는 경력의 끝을 의미하는 '마침표'가 아닌 '쉼표'였다고 말했다. 새로운 시작 전에 찍은 쉼표. 그녀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전공만 계속 따라가지 않았고, 좌절을 딛고 넘어선 덕에 인생을 정리하며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지영 대표는 이제 한국의 공간컨설팅 분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전문가가 됐다.
"저는 시작해보고 맞나, 안 맞나를 판단하는 사람이에요. 시작도 안 해보고 긴지, 아닌지 어떻게 확인해요. 저의 무모하지만 도전하는 정신이 성공의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애들은 어떻게 하고?" 한국의 워킹맘들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질문이다. 아직 한국에서 '여성 사업가'로 사는 일은 녹록지 않다. 먼저 워킹맘이자 여성사업가의 길을 걸어본 그녀는 "육아부터 회사 일까지 완벽하게 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모든 사람이 다 잘할 수는 없으니까, 그 부담감을 내려놓는 것이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여성으로서 일할 때, 다 잘하려고 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내가 뭔가를 포기해야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아무렇지 않아요."
그녀는 자신한다. 집에서의 엄마 역할도 중요하지만, 좋아하는 일을 해서 성공한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분명 교육이 될 수 있다고. 그래서 그녀는 강연이 있을 때, 아이들과 함께 가기도 한다.
매 계절 자식을 집 밖으로 데리고 나가, 사계절을 몸소 느낄 수 있도록 도와준 아버지처럼 말이다. 그녀는 지금 당장 아이들 손을 한 번 덜 닦이고, 가방 한번 못 챙겨줘도, 앞으로 자신이 보여줄 모습이 그 부족함을 채울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경력단절? 헛된 경력은 결코 없다
새 출발, 그리고 여성들과 함께 시작한 사업. 처음부터 이렇게 계획한 건 아니지만, 함께 공간컨설팅 사업을 진행할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이렇게 모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와 그녀의 직원들도 그랬듯, 새로운 경력을 만들면 지난 경력은 반드시 '단절'이 아닌 '스펙'이 된다고 그녀는 강조한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내가 했던 경력이 있으니까 또 다르죠. 전문직인 거예요. 가지고 있던 경력을 우리 회사로 오면서 또 다른 경력으로 만들게 된 거죠."
보통 경력단절은 다른 사람의 결정 때문에 경험하게 된다. 본인이 원해서 경력단절을 마주한 여성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이 표현을 더욱 새롭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경력단절 여성'이라는 표현에서부터 오는 서글픔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말한다. 과거에는 이 표현이 맞았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라고.
"나 화려하게 인생 1막 끝냈어. 이제 새로운 경험을 쌓을 거야."
경력단절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위해 지금껏 경력을 쌓은 것이라는 발상의 전환. 지금의 나를 위해 과거에 내가 쌓은 커리어를 소중히 여기며, 두려워하지 말고, 우선은 시작하자는 것. '이 세상에 버릴 경험은 없다'는 게 바로 이 대표가 도전을 앞둔 여성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