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멋진 날, 마음을 쓰고 세상을 만나다> 책 표지67명의 늦깎이 시인들이 쓴 70편의 시와 산골생활을 하며 아름다운 자연을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 초록담쟁이의 그림이 함께 실렸다.
책숲놀이터
글자를 통해 세상에 새로운 창을 내다
부끄럽게도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문해교육'이라는 말 자체가 낯설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문맹률이 가장 낮은 우수한 나라라고 철석같이 믿었기에, 옛날 일이거나 딴 세상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쟁과 가난, 또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배울 기회조차 없었던 지난한 세월이 참 무심했다.
또한 2017년 성인문해능력조사에 따르면 만 18세 이상 성인 중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읽기, 쓰기, 셈하기 등이 불가능한 사람은 100명 중 7명꼴이라고 한다. 단순히 글자를 읽는 것 이상으로 글을 해석하고 소통할 수 있는 '문해율'은 생각보다 낮은 것이다.
그래서일까? 시를 읽으며 느낄 수 있었다. 세상을 보는 새 창을 연 것처럼, 감고 있던 눈을 뜬 것처럼 학구열에 불타오르는 시인들의 마음을. 남들처럼 읽을 줄 몰랐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세월에 대한 원망이 눈 녹듯이 가라앉고 그 자리에 배움의 기쁨이 피어났다.
생일도 모르고 평생을 살았다
서울 사는 막내가 전화해서 알았다
바빠서 못 온다는 큰 아들
일이 풀리지 않는지 걱정이다
아침밥도 굶고 문해학교에 갔다
친구들이 선물로 '큰 글씨' 책을 주었다
선생님은 일기장을 선물로 주셨다
문해학교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 가장 늦게 받은 선물
오늘도 개미처럼 삐뚤삐뚤 일기를 쓴다
일기장을 펴 볼 때마다
하루하루 늘어가는 늦깎이 공부 이야기가
팔순 잔치상 받은 것처럼 행복하다 (권일순, '늦게 받은 선물')
글로 뱉지 못했던 그동안의 속마음을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쓴 시 안에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 표현하는 즐거움이 녹아있다. 이제는 버스도 걱정 없이 타고 손자들에게 동화책 읽어줄 날을 기다린다. 문자메시지로 사랑하는 마음을 마음껏 표현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멈추지 않고 계속 배우고 싶은 꿈이 생겼다.
이 나이에 입학식을 했다
가슴이 두근두근 설렌다
나도 이제 학생이다
어머이 아부지는 내를 안 가르쳤지만
난 이제 공부를 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태극기도 그리고
애국가도 불러 본다
내 꿈이 두근두근 펄럭인다
하늘에 있는 우리 어머니 아부지 졸업식 날 오실까 (유말순, '내 꿈')
소녀할매, 소년할배의 새로운 시작
책머리에 쓰인 '소녀할매', '소년할배'라는 말이 참 와닿는다. "잘 물든 단풍은 봄꽃보다 아름답다"(106쪽)는 이금선 시인의 말처럼, 황혼의 나이에도 새로 배우려는 마음은 누구보다 젊고 예쁘다.
한글학교 입학식에서 감격스러운 마음에 눈물을 터뜨리고, 열심히 배워 하늘나라에 계신 부모님께 당당한 모습을 보여드리겠다고 다짐하는 소녀할매, 소년할배들의 새로운 시작을 무조건 응원하고 싶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는 책을 조용히 거실 한편에 두었다. 아빠의 돋보기가 놓인 자리 앞, 엄마가 가끔 앉아서 졸곤 하는 소파 맞은편에. 색색들이 빛나는 꽃 사이에 마치 유일한 이름을 가진 꽃 한 송이처럼 두 뺨에 홍조를 띤 소녀할매가 표지 안에서 웃고 있다.
부모님께서 이게 무슨 책이냐고 물으시면 나는 짐짓 모르는 척 책이 참 예쁘다, 하고 다시 한번 함께 읽어볼 생각이다.
어느 멋진 날 - 마음을 쓰고 세상을 만나다
경남 문해교실 67인 (지은이), 초록담쟁이 (그림),
책숲놀이터,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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