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누의 모양을 보고 냄새를 맡는 순간 나는 지중해 어디쯤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배현혜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물고기 머리와 꼬리가 알록달록하게 그려진 상자에 'CASTELBEL PORTO'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니 회사 이름인 것 같았고 일단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풍겼다. 가운데에는 굵은 고딕체로 'SABONETE'라고 쓰여 있었다. 비누라는 이야기인가? 어느 나라 말인가? 그냥 제품 이름인가? 작은 필기체 글씨로 'Sea Salt &Lemon'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니 향기가 나는 무엇인가는 분명했다.
방향제일까? 디퓨져인가? 또 갖은 상상을 하며 상자를 여니 나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모양의 것이 들어 있었다. 하얗고 길쭉한 물고기 모양을 한 비누였다. 비늘과 꼬리지느러미의 세공에 꽤 정성을 들인 제품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상자를 열자마자 시작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상큼한 시트러스 향이 진하지만 부드럽게 내 코에 스며들었다. '아~ 참말로 고급스러운 향이구나~' 이 물건의 정체가 너무나 궁금해서 친구에게 선물 잘 받았다는 인사 전화를 잠깐 뒤로하고 검색부터 했다.
이 길쭉하고 하얀 물고기의 정체는 역시 비누였다. 이 물고기는 정어리였다. 유럽의 유명 셰프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주방 비누라고 했다. 요리할 때 고기나 생선 등 다양한 식재료를 만진 후 주방 세제로 손을 씻었을 경우 잔존한 화학물질이 음식에도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그런 것을 막아주고 탈취 효과와 보습효과를 더해 주는 위생적인 비누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심지어 포르투갈 포르투에서 수작업으로 만들어지고 있다고 했다. 그렇군. 어쩐지. 비누의 모양을 보고 냄새를 맡는 순간 나는 지중해 어디쯤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비록 포르투갈과 지중해는 상관없다고 해도 기분 좋은 시트러스 향은 영화 <맘마미아>를 연상케 했다. 빛나는 태양과 시리도록 파란 바다, 유쾌한 섬사람들의 구릿빛 피부.
코로나 19로 여행은 꿈도 못 꾸고 있는 요즘, 이 작은 비누 하나가 여행 욕망을 꿈틀거리게 하기 충분했다. 나를 가보지도 못한 머나먼 지중해의 어느 작은 섬으로, 혹은 포르투갈의 작은 어촌 마을로 여행하게 했다.
M에게 고맙다고 전화로 인사했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 받아서 무척 기쁘다고. 그리고 덕분에 신문물을 접하게 됐다고. 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역시나 이수근, 신동엽의 뺨을 후려갈겼다.
"이 비누 몰랐어? 네가 '벌써 13개째 쓰고 있는 중이야~'라고 할 줄 알았어~."
내가 주방 에세이를 쓰고 있다 보니 이런 것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줄 알았나 보다. 하지만 나는 군산에 살고 있는 사람. M은 기네스북에도 올라가 있는 세계 최대 백화점인 신세계 센텀점이 있는 곳에 살고 있는 사람. 그 정보량의 차이는 컸다. 나는 그런 물욕은 이미 다 버렸다며 웃었다.
지금도 그 하얀 정어리는 싱크대 앞에 잘 매달려 있다. 나는 주로 설거지 후에 손 씻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손을 닦을 때마다 침이 고일 정도로 상큼한 향이 내 손에 밴 불결한 냄새를 지워준다.
그리고는 한 번도 가본 적 없지만 꼭 알 것만 같은 이탈리아의 어느 작은 섬을 여행하고 있는 나를 상상하게 한다. 작고 하얀 물고기 비누는 나를 여행하게 한다. 들뜨게 한다. 설거지 거부증을 치료해 준다. 이제 설거지가 싫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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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도 파노라마로 하늘을 즐길 수 있는 군산 어딘가에서 '기껏해야 대단한 것 없이 다만' 깨작깨작 나를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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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거지 거부증을 치료해주는 하얗고 길쭉한 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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