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성곽성벽을 따라 멀리 장안문이 보인다. 성벽을 따라 내려오면 화홍문 지붕이 보이고 그 위로 방화수류정이 의젓하다. 방화수류정 앞엔 용연이 성벽 및 누정과 어우러져 멋들어진다. 가까운 성벽엔 북암문이 선명하다.
이영천
이런 배경에서, 왕은 화성에 신도시 건설을 구상(1789년)하고 실행(1794∼1796년)에 옮긴다. 화성은 철저한 계획도시다. 아버지 능을 옮기며 그곳에 살고 있던 백성들을 신도시로 이주시킨다. 효(孝)를 앞세운다. 백성들은 왕의 효심에 수긍한다. 정조는 화성을 왜 만들었을까?
복합적인 목적이다. 가장 큰 명분이 백성이다. 삼남(三南)과의 물자교역과 교통·상업·군사·행정·산업(농업)중심지를 만든다는 테제를 내세운다. 이로써 백성들의 삶을 어루만진다고 하였다. 화성을 남쪽으로 통하는 교역 요충지로 만들어 낸다. 삼남 교통의 결절점(結節點, Node, 여러 가지 기능이 집중되는 접촉 지점)이 된다. 정조 사후, 화성에서 상업은 무척 발달한다. 삼남 보부상 거점이 형성된다. 한양과 삼남의 중계지 역할을 한다.
군사적으로도 획기적이다. 이전 성곽의 단점이었던 단순 1차 방어 수준을 벗어난다. 생활과 방어, 산성(山城)과 둔취 기능을 동시에 추구하고 충족시킨다. 18세기 최첨단무기 사용이 가능토록 모든 시설을 갖춘 최신식 성곽을 만들어 낸다. 1793년에 이미 친위부대 장용영 외영(外營)을 화성에 설치, 5천의 병마를 주둔시킨다. 여기에 주변 5개 읍(용인, 안산, 진위, 시흥, 과천) 군사 1만3000을 외영에 합속(合屬, 한데 합하여 소속시킴)시킨다.
일종의 지역방어체제 구축이다. 지방도시에 한양과 유사한 5위 체제를 구성한다. 모든 군권이 왕의 수중으로 들어왔다는 선언이며 힘의 과시다. 또한 행궁을 두어 행정 중심지 기능을 부여한다. 부근 몇 현을 화성의 속현으로 삼는다. 1793년 수원을 유수부(留守府)로 승격시키고, 이름도 화성으로 바꿔 부른다.
농업의 연구·발달을 위해 화성 주위 3곳에 큰 저수지를 만들고, 둔전(屯田, 각 궁과 관아에 속한 토지. 관노비나 일반 농민이 경작하였으며 소출 일부를 거두어 경비로 충당)을 일군다. 북에 만석거와 만안제, 서에 축만제(현 서호), 남에 만년제를 축조한다. 자급자족하는 낙원도시 화성을 꿈꾼 것이다. 이중 서측 축만제는 오랜 기간 우리 농업기술연구의 중심지역할을 수행한다.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이 이곳에 있었다.
또한 당파, 특히 노론세력에 대한 견제와 화합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정치를 개혁하고, 인재를 고루 등용할 것이니 함께 하자는 뜻을 담는다. 적대적인 행위가 아니다. 껴안고 함께 가는 길을 열어둔다. 1795년 화성 행행에서 친위군인 장용영을 동원, 화성 전역에서 군사력을 과시하는 장대한 야간훈련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에게 힘으로써 시위한다. 수구적인 그들의 생각이 바뀌기를 바란다.
다음이 신기술의 시현이다. 벽돌축성에 거중기 등을 실험하고, 실학사상을 현실에서 구현해 보인다. 정약용의 생각과 채제공(蔡濟恭, 1720~1799년. 남인 영수. 사도세자 스승으로 왕의 최측근 중 한사람)의 감독으로 단기간에 화성을 축조해낸 일이 이를 가장 잘 보여준다. 이렇듯 정조는 화성축조와 행행을 통해, 왕이 꿈꾸던 새로운 세상을 장대하게 펼쳐 보이고자 하였다.
조선 르네상스의 결정판 화성 행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