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공원에서최시형 선생 동상 앞에서 윤석산 교수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이명옥
이번 기행은 수운 최제우 순도지 대구 관덕정 심고를 시작으로 해월의 탄생지 경주부터 해월의 발자취를 차근차근 더듬어 해월의 족적을 따라 순례길을 이어갔다.
해월 최시형 선생은 경주시 황오동 227번지에서 태어나 5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12살 때 아버지마저 잃어 고아가 됐다. 심부름꾼으로 일하며 어렵게 살던 해월은 17세 때 포항시 북구 신광면 기일리 울금당 제지소 마을에서 한지를 만들어내는 일을 거들다가 18세 때부터는 여러 마을에 종이값을 수금하는 일을 맡았다. 제지소에서 일하며 익힌 기술과 관계를 맺게 된 여러 사람들은 나중에 <동경대전>을 간행하는데 많은 보탬이 됐다.
19세 대 밀양 손씨를 부인으로 맞아들인 해월은 마북동에 살면서 중망(지금의 면장이나 이장)이 되어 마을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공명정대하게 일을 처리했다. 33세에 마북을 떠나 검곡에서 화전을 일구며 산다. 35세 때 입교해 도를 받는다. 37세에 북접주가 되었다가 도통을 이어받아 2대 교주가 되어 교세를 확장하고 포덕을 펼친다.
해월 최시형 선생의 옛 집터가 있는 검곡은 해월이 2대 교주로 천도를 지키고 수행한 중요한 장소다. 옛 집터는 산속에 묻혀 있어 당시의 모습을 짐작하기 어렵지만 한울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엄동설한에 목욕재계를 했을 곳으로 짐작되는 웅덩이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돌아 본 장소는 최초의 접주제 실시 지역인 포항시 북구 흥해읍 매산리 636-67, 50번지 손봉조의 집이다. 접주제는 동학이 얼마나 쳬계적이고 조직적으로 포덕 활동을 펼치고 교세를 관리했는지 잘 알게 하는 증거다.
수없이 피신을 해야 했기에 보따리 하나만 가지고 다녀서 '최보따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는 해월은 누구에게도 자신의 봇짐을 지우는 일 없이 자신의 봇짐을 스스로 지고 다녔고, 잠을 잘 때 한쪽 어깨는 봇짐 끈을 묶은 채 봇짐을 베고 자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다고 전한다.
보따리 하나만 지고 끊임없이 옮겨 다녀야 했던 해월 최시형 선생의 고단했을 여정의 무게가 그의 발자취마다 새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