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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을 채우는 음식, 누룽지

등록 2020.11.13 10:29수정 2020.11.13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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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에 먹는 음식은?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주관식 문제였다.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아, 그렇구나. 그럴 수 있겠다, 라는 순진하다 못해 기초 상식이 전혀 없어 무식한 나는 우리 집에서 가장 귀한 음식을 묻는 질문으로 받아들였다.


우리 집에서 가장 귀한 음식은 뭘까? 가장 귀해서 아껴 먹는 음식. 일 년에 한 번 겨우 먹을 수 있는 음식. 난 한참을 고민하다가 설날에 먹는 음식이라는 질문에 '누룽지'라고 썼다.
 
 솥밥 누룽지도 맛있지요.
솥밥 누룽지도 맛있지요.Pixabay
 
우리 집에는 누룽지가 귀했다. 압력밥솥 바닥에 들러붙은 밥풀에 물을 자작하게 끓여 뽀얗게 우러나오는 누룽지는 식사를 마친 아빠의 몫이었다. 하얗게 김이 올라오는 누룽지 한 그릇을 아빠가 후후 불며 후루룩 드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얹힌 속이 다 내려가는 거처럼 개운해 보였다.

단숨에 그릇을 비워내는 아빠를 보면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음식은 저것일지도 모른다고 굳게 믿었다. 나는 구수한 누룽지가 정말 먹고 싶었으나 1남 2녀의 막내로 서열이 가장 낮았기에 내 차지가 될 수 없었다. 한 대접의 모락모락 피어나는 누룽지는 엄마가 아빠에게만 차려주는 특별한 만찬과도 같았다.

설날에 먹는 음식이 떡국이라는 걸 정확히 모르기도 했지만, 설날 대표 음식 떡국과 추석 대표 음식 송편을 물리치고 나에게 가장 귀한 음식은 누룽지였다. 혹시나 맞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아주 작은 글씨로 썼던 누룽지. 자신 없이 조그맣게 쓴 누룽지라는 글자에서 퍼져 나오는 초라함에 틀렸다는 채점의 작대기가 그어졌을 때 내 마음에도 스크레치가 생겼다. 마침 우리 집에 놀러 온 옆집 아주머니는 그 시험지를 보고 숨도 못 쉬며 배꼽 빠지게 웃으셨다지.

가장 귀한 음식이라 여기던 누룽지가 틀리다니. 내 마음이 들킨 거 같았다. 정답인 떡국에 비해 초라해 보이던 누룽지가 내 차지도 될 수 없었다는 걸 들킨 거 같았다. 밥이 눌어붙은 누룽지마저 눈치를 봐야 했던 내 마음이 그때만큼은 새카맣게 타버렸다. 이 사실을 마음속에 비밀처럼 간직했다가 이제야 밝힐 수 있는 걸 보니 엄청 슬펐던 모양이다. 뜬금없이 아들에게 "설날에 먹는 음식이 뭐게?"라고 묻기도 했지만.

"오늘 아침에 뭘 먹고 싶냐?"는 나의 물음에 아이는 "누룽지"라고 대답한다. 입맛 없을 때 누룽지에 김치 한 조각 올려두고 먹는 그 맛을 너도 아는구나. 또는 김 한 장 올려두고 먹는 그 맛은 얼마나 착 감기는지. 젓갈을 올려두고 먹으면 환상이지.


임신하고 입덧이 심해 아무것도 먹지 못했을 때 누룽지와 동치미만 겨우 먹을 수 있었다. 그것이 아이도 누룽지를 좋아하는 이유일까. 남편은 왜 그런 걸 먹냐고 하지만 다른 반찬이 따로 없어도 누룽지를 먹고 마시면 속도 편안하고 영혼까지 맑아지고 깊어지는 기분이다.

지금도 누군가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먹어본 음식과 먹어보고 싶은 음식 사이에서 엄청 고민하다가 조용하게 또 자신 없이 대답할지도 모른다. 그건 바로 누룽지라고. 누룽지 한 그릇으로 세상을 다 얻은 거 같았던 어린 시절의 빈 그릇을 더듬어 따끈한 누룽지를 한가득 담아본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누룽지 #영혼 #설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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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감이 홍시로 변하는 감, 생각이나 느낌이 있는 감, 어디론가 향해 가고 있는 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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