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후 포즈를 취한 미국 플로리다 잭슨빌 거주 정상호(82)씨. 그의 할아버지 정달하 선생은 <백범일지>와 <한국독립운동사>에도 등장한다.
김명곤
미국 플로리다 잭슨빌에 거주하는 은퇴 의사 정상호(82)씨가 "우리 할아버지가 '백범일지'에 나오는데, 이거 말해도 될까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가 말한 대로 살만큼 살았고 별다른 평지풍파 없이 말년을 보내고 있는데, 100년 된 할아버지 이야기로 이래저래 오해를 살 것 같은 두려움이 묻어 있었다.
1973년 미국으로 유학 온 이후 47년 동안 플로리다 잭슨빌에서 의사로 살아온 정상호씨의 집안 내력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정씨는 한인회장을 여러 차례 역임하고, 흑인 빈민가에서 의료활동을 하며 자연스레 지역 주류 매체는 물론 한인 신문들과 몇 차례 인터뷰를 했다. 그러나 그의 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로, <백범일지>에 등장한다는 사실을 밝힌 적은 없었다.
그를 만나기 전 전화로 먼저 확인하면서 그의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사에 등장하는 유명한 '105인 사건(일명 안악 사건)'에 연루된 인물 중 하나라는 이야기를 듣고 귀가 번쩍 뜨였다. '105인 사건'이 뭔가. 1911년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식민통치를 강화하고, 반일 민족 저항세력들의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다수의 신민회[1907년 초에 무실역행(務實力行)을 방향으로 삼고 안창호, 이동녕, 이승훈 등이 비밀리에 조직한 항일단체] 회원들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을 체포·고문해 투옥한 사건이다.
일제는 1910년 12월 데라우치 총독이 압록강 철교 개통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북지방을 순방할 때 신민회원들과 황해도 안악군 일대의 지식층과 재산가 600여 명이 공모하여 그를 암살하려 했다고 억지 주장을 하며 대대적인 검거 작전에 돌입했다. 안악 사건으로 체포된 인사들 중에는 김구(金九), 김홍량(金鴻亮), 최명식(崔明植), 이승길(李承吉), 도인권(都寅權), 김용제(金庸濟), 이유필(李裕弼) 등이 있었다. 이들은 안악의 양산학교(楊山學校)와 면학회(勉學會)를 중심으로 애국계몽·구국운동에 헌신한 독립지사들이었다.
일본 경찰은 600명을 체포·고문을 자행한 끝에 거짓 자백을 받아냈고, 이 가운데 123명을 혐의자로 기소했다. 무려 20회의 재판을 진행한 끝에 105인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면서 '105인 사건'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정상호씨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안악 사건에 연루돼 있고, 이 같은 사실이 <백범일지>에도 나온다고 했다. <백범일지>는 한국의 청소년들부터 어른들에 이르기까지 널리 읽힌 책이다.
기자의 서고에 꽃혀 누렇게 변한 1983년 발행된 7판 <백범일지>(1979년 초판 발행)를 뒤져보니 162쪽에 '정달하(鄭達河)'라는 이름이 들어 있었다.
이번 통에 잡혀온 사람들은 황해도에서 안명근을 비롯하여... 재령에서 정달하, 민영룡, 신효범, 안악에서 김홍량, 김용제, 양성진, 김구... 경성에서 양기탁, 김도희, 강원도에서 주진수, 함경도에서 이동휘가 잡혀와서 다들 유치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