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정상에서 바라본 조국강산.
박도
맥아더기념관
그날 우리는 숙소로 돌아와 긴급회의를 가졌다. 이도영 박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현재 우리로서는 퍼즐 게임처럼 여러 문서에서 그 진상을 추정하여 진실을 짐작하는 방법밖에는 도리가 없습니다. 백범 배후를 알 수 있는 딱 부러진 문서를 찾기란 현재로서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 미국 당국이 스스로 진실을 발표하거나, 한국 정부가 외교 채널로 정식 요청하여 비밀문서 열람을 하지 않고서는…."
그날 회의 결론은 갑론을박 끝에 북데기(짚이나 풀 따위가 함부로 뒤섞여서 엉클어진 뭉텅이)에서나마 알곡을 찾자는 데 모아졌다. 이튿날부터 우리 김구 팀은 눈알이 볼가지도록 북데기 문서를 뒤졌다.
2004년 2월 25일, 나와 권 선생은 이도영 박사의 안내로 버지니아 주 남단 노퍽(Norfolk) 시의 맥아더기념관으로 갔다. 맥아더기념관 자료실은 단층으로 조촐하게 꾸며져 있었다. 맥아더가 생전에 소장하였던 도서와 재임 때 받은 선물들이 잘 진열돼 있었고, 자료실에는 수많은 파일들이 잘 갈무리되어 있었다.
도착 즉시 맥아더기념관 자료실에 비치된 영상자료 비디오를 틀었다. 1950년 5월, 한국전쟁 바로 직전에 서울 근교에서 벌어진 좌익사범 처형 장면이 방영됐다. 군인 20여 명이 좌익사범을 나무 기둥에 묶은 후 가리개로 눈을 가리고, 가슴에 사격 표지판을 붙인 다음, 20여 미터 거리에서 60여 명의 사수들이 일제히 사격했다.
그런 뒤 감독관은 권총을 들고 나무기둥으로 다가가 일일이 확인한 뒤 숨을 쉬는 이는 그 자리에서 사살했다. 그 장면은 차마 볼 수 없어서 눈을 감았다.
우리 김구 조사팀이 2004년 2월 2일부터 3월 10일까지 30여 일간 검색한 자료는 모두 1만 9600여 건에 달했다. 하지만 백범 암살 진상을 밝힐 수 있는 딱 부러진 문서는 끝내 찾지 못했다.
2004년 3월 10일 종합평가를 거친 뒤 나름의 보고서를 만들었다. 귀국 경유지였던 LA에서 재미 동포들의 열렬한 환대를 받으며 사흘을 머문 뒤, 3월 16일 LA를 출발하여 3월 17일 인천공항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