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간을 위한 취기로운 투자, 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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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위스키에 빠지게 된 건 5년째 진행하고 있는 술 마시며 시 읽는 팟캐스트 <시시콜콜 시시알콜> 때문이었다. 시집에 어울리는 술 하나를 골라 시에 취하고 술에 취하는 방송인데, 매 회를 준비할수록 자연스레 다양한 술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소주와 국산 맥주밖에 모르던 나는 어느새 다양한 수제 맥주와 각종 와인을 섭렵하게 되었고, 마침내 운명처럼 위스키를 만나게 됐다.
나를 처음으로 매료시킨 위스키는 '글렌피딕 15년'이었다. 높은 도수에 비해 목 넘김이 부드러웠다. 첫맛은 향긋했고 끝맛은 화사했으며 약간의 달콤함까지 진득하게 느껴졌다. 한 모금의 술에서 이렇게 다양한 맛을 느낄 수 있다니. 소주 몇십 병 살 돈을 합쳐야 위스키 한 병을 살 수 있었지만, 이 술에는 그럴만한 매력이 충분히 있었다. 그때부터 한 병, 두 병씩 위스키를 사 모으기 시작했다. 술자리를 조금씩 줄이고 그 돈으로 위스키를 샀다.
일반적인 술과 달리 위스키는 그 맛을 천천히 음미하는 술에 가깝다. 소주나 맥주 같은 술은 입안에 털어 넣는 느낌이 강하지만, 위스키는 풍성한 맛을 천천히 맛보게끔 해준다. 사정없이 취하게 만드는 술이라기보다는 적당한 취기를 온몸에 퍼뜨리는 술인 것이다. 잠들기 전 마시는 위스키 한 잔은 기분 좋은 취기를, 따끈따끈한 온기를, 그리고 다가올 내일에 대한 용기를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느슨해진 몸으로 침대에 누우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어느새 나는 밤마다 마시는 위스키 한 잔을 고대하게 되었다.
그즈음부터였다. 소주나 맥주를 파는 일반적인 술집보다 바에 가는 일이 늘어났다. 그곳에서 새로운 위스키를 맛보게 되리라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그렇게 한 잔, 두 잔 주문을 하다 보니 어느새 손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위스키를 마셔보았다. 위스키의 세계는 정말 무궁무진했다. 어떤 위스키는 특유의 스모키한 향이 내 목을 간질였고, 또 다른 위스키는 달콤하고도 느끼한 질감이 목구멍을 휘감았다. 심지어 같은 위스키라도 마실 때마다 그 맛이 다르게 느껴졌다.
위스키에는 다음이 있다
보관이 용이하다는 점도 좋았다. 위스키와 비슷한 가격의 와인 한 병을 마신다고 해보자. 코르크 마개를 여는 순간부터 와인 한 병은 다 비워져야만 하는 운명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기와 만난 와인은 산화하기 마련이고 그 맛도 점차 변할 수밖에 없으니까. 병 속에서 찰랑거리는 남은 와인을 볼 때면 마음이 저렸다. 이걸 다 마셔야 했는데! 맥주도 마찬가지다. 몇만 원씩 하는 값비싼 맥주라도 일단 병따개를 여는 순간 다 마시는 수밖에 없다. 다음은 없다.
그러나 위스키는 그렇지 않다. 부담 없이 뚜껑을 열고 한 잔을 쓱 따른 뒤에 다시 마개를 닫아 실온에 보관하면 끝이다. 맥주나 와인처럼 냉장 보관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더욱 완벽하게 보관하고 싶다면 위스키 마개 주변을 필름으로 둘러주면 그만이다. 두고두고 먹을 수 있는 술이라는 점에서 위스키는 묘하게 가성비 좋은 술이 된다. 게다가 집안에 쌓인 위스키 병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를 준다. 늘 내 곁에서 변함없이 기다려주는 술이 우리 집에 있다니. 변치 않는 사랑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본격적으로 위스키를 마시기 전까지, 나에게 위스키란 공부해야 하는 술, 잘 알아야만 마실 수 있는 어려운 술이었다. 하지만 위스키는 모르고 마셔도 맛있는 술이었다. 알고 마신다면 또 그 나름의 맛이 있을 뿐. 바텐더의 휘황찬란한 설명이 없어도, 위스키의 역사와 전통을 몰라도, 좋은 건 좋은 것이다. 이해하지 못해도 느낄 수 있으면 충분하다. 사랑이란 감정은 원래 그런 것이니까.
제주도 휴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서둘러 좋아하는 재즈 음악을 틀었다. 음악은 위스키의 맛을 배가시켜주는 훌륭한 안주니까. 그리고 글렌피딕 30년 한 잔을 조심스레 따른 후에 한 모금, 한 모금을 아껴 마셨다. 43%라는 높은 도수가 믿기지 않을 만큼 부드러웠다. 생각보다 밋밋한 첫맛에 살짝 놀랄 즈음엔 화사하고도 달콤한 맛이 목을 타고 올라와 입과 코를 적셨다. 여운이 긴 술이었다.
이 술을 마시는 모든 순간이 황홀했다. 동시에 이토록 맛있는 술이 나에게 한 병밖에 없다는 게 아쉬웠다. 만나자마자 이별을 예감했기 때문이랄까. 나는 천천히 이 맛을 음미하면서 오래오래 이 술과 사랑에 빠지리라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