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버지니아 주 노퍽의 맥아더기념관 자료실 앞에서 재미 사학자 고 이도영(오른쪽) 박사와 함께(2004. 2. 25.)
이도영
"이 아저씨 기사 그만 봤으면" vs. "댓글 신경쓰지 마세요"
오마이뉴스는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여행뿐 아니라 일상적인 '사는 이야기'도 기사화할 수 있었다. 그래서 초기에는 '그리운 그 사람' '파리에서 런던까지' '일본 겉핥기' '구름에 달 가듯이' 등 연재기사로 일주일에 한두 꼭지씩 송고했다. 독자들의 댓글은 찬사만 아니라 비난도 많이 달렸다.
"어머! 난 이 아저씨 기사 그만 봤으면 좋겠다"는 익명의 아픈 댓글이 있는가 하면, "선생님! 댓글에 괘념치 마세요. 곧 선생님의 글을 좋아하는 광팬도 생길 겁니다. 아자! 아자!" 등 성원의 댓글도 있었다.
그 비난의 악플을 곰곰이 뜯어보면 모두가 나에게 약이었다. 내 글이 어딘가 불성실하거나 잘못이 있기 때문에 뭇매를 가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때부터는 더욱 기사에 정성을 쏟았다. 보통의 경우 기사를 송고하기 전에 평균 대여섯 번은 퇴고한 다음 보냈다. 그래도 기사가 화면에 뜬 뒤에 보면 오탈자, 비문이 눈에 보였다.
그러면 즉시 시민기자 게시판을 통해 수정 요청을 했다. 아마도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에게 나는 엄청 짜증나는 시민기자로 각인됐을 것이다. 그런 각고의 노력 탓인지 비난의 댓글은 날이 갈수록 현저히 줄어들었다.
나는 늦깎이 기자로서, 작가로서 좀 더 의미 있는 글을 쓰고자 '의를 좇는 사람'이라는 연재를 시작했다. 그 첫 번째로 한 모임에서 인사를 나눈 바 있는 박종철 군의 아버지 박정기 씨에게 부탁드리자 흔쾌히 응해주었다.
그분을 인터뷰한 뒤 취재한 기사를 보름 남짓 동안 쓰면서 여러 번 퇴고를 거듭했다. 1회분으로는 도저히 소화할 수 없어, 이를 2회분으로 나눈 뒤
[의를 좇는 사람 1] "종철아, 내 니 몫까지 하마…(2003. 6. 6.)"라는 제목으로 2003년 6·10항쟁 기념일 닷새 전에 송고했다. 그 기사에 독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댓글도 뜨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