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도시산업문제협의회 등이 주관한 고 김진수 영결식 안내 자료(1971년 6월 21일)는 “고 김진수 군의 죽음은 오늘의 기업 풍토가 가져온 죽음이며 폭력의 난무가 가져온 죽음”이라고 알리고 있다. 윤조덕 원장은 김진수 열사의 장례식에서 집행위원회 부위원장과 호상을 각각 맡았다.
윤조덕
서슬 퍼런 군사정권도 막지 못한
당시 장례식 고문들은 교계 인사들이었다. 그간 윤 원장의 활동을 지켜본 그들은 대학생 신분이던 윤 원장에게 장례집행위원회 부위원장과 호상을 맡겼다. 조지송 목사가 직접 권유했다고 한다.
"세브란스병원에서 오후 3시엔가 발인 예배를 했지. 장지인 모란공원묘지로 출발하려 했을 때였어. 학생들이 만장 수십 장을 만들어서 기습적으로 올려 들었지. 노동운동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어. 교계 어른들이 참여한 장례식이었으니 서슬 퍼런 박정희 정권에서도 어떻게 하질 못했지. 이처럼 김진수 열사 장례식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결합한 계기가 됐어."
그날 윤 원장과 산업사회연구회 회원들이 참여한 김진수 열사의 장례식에는 이런 문구가 적힌 만장이 등장했다.
'차라리 철폐하라, 허울 좋은 노동 조건'
'김진수의 죽음은 제2의 전태일 사건'
'노동운동을 탄압 말라! 현재의 모든 노동운동 탄압을 즉각 중지하라'
'이 사건을 암장하려 한 악덕 경찰 즉각 처단하라!'
'언론은 약자의 편에서 김진수 사건의 경위와 진상을 정직하게 보도하라!'
'노동자들을 더 이상 죽음 속으로 몰아넣지 말라!'
- <김진수-시대의 불꽃3>(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2년, p148~p152)
공은 공대로 시대의 평가에 맡겨야
인간의 기억만큼 불완전하고, 단편적이며, 자의적이기까지 한 것이 또 있을까. 불리하고 어두운 구석은 묻어두고, 조금이라도 유리한 부분은 과장하기 마련이다. 동료가 가르침을 전해준 사이로 뒤바뀌고, 때로는 인생의 물줄기를 틀어준 위인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윤 원장은 인터뷰 내내 이런 기억의 덧칠에 대해 엄격하게 거리를 두려 했다. 공과 과에 대해 평가하지 않으려 했고, 자신의 지난날이 빛나 보이거나, 타인의 공이 작아지는 것에 대해서도 명확한 선을 지켰다.
윤 원장이 풀어놓은 1970년대 이야기에는 고 조영럐, 장기표, 고 제정구, 고 김근태, 서경석, 인명진, 김문수, 이미경, 최영희, 장하진 등 익숙한 정치권 인물들이 등장한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이들도 있고, 이념과 사상적으로 윤 원장과 반대편에 서 있는 인물들도 있다. 윤 원장은 "시대의 역사는 시대의 역사로 인정해야 한다"며 현재 시각으로 당시 인물들을 평가하는 것을 경계했다.
"내가 유일하게 서경석 목사에 대한 용비어천가를 쓴 사람이야. 서울대 공대 산업사회연구회 민주화운동사(안) 50년사 정리하는 내용에 '과거는 과거고, 현재는 현재다'라고 했어. 서경석 선배가 그 시대에는 굉장히 열정적이었어. 후배들이 많이 따랐고, 교회 청년학생 운동의 핵심이자 개척자였지. 굉장히 선진적이고, 일반 학생운동권 중심 인물과도 밀접했지. 서경석 선배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사람이야. 그때 학생운동 개척자들이 장기표 선배, 고 조영래 선배, 고 김근태 선배 등의 그룹이었으니까. 다만 서경석 선배는 1971년 군대를 가게 됐고, 노동 현장을 가보지 못했기에 한계가 있었어. 선배가 지금은 태극기 부대의 핵심멤버 중 하나인데, 그게 현장 경험의 차이에서 나오는 거라고 봐.
또 빈민운동은 김진홍 목사의 활빈교회가 있었고 제정구 선배의 야학 등이 있었지. 1960년대 말 청계천변 움막과 판자촌 등지에서 시작해 1970년대 초반부터 한양대 부근 둑방에 자리 잡았지. 나도 그곳에 꽤 드나들었지. 여기저기 많은 이들을 만나 의견을 나누며 서로를 성장시켰어."
윤 원장은 공교롭게도 유신이 시작되자마자 군대에 입대했다. 윤 원장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했음에도 감옥을 가거나 수배를 받은 적이 없기에 무난히 군대 생활을 마치고 만기 제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