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4월 1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법과대학 학생회의 멧세지'“3선개헌 음모를 저지하기 위한 우리의 자랑스런 투쟁에서 자퇴를 강요당하고 학원에서 추방된 학우의 재입학을 위하여 우리는 진지하고 부단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읍니다.” 이철, 서중석, 안병욱 등의 이름이 보인다.
윤조덕
노동자들의 삶 속으로 깊숙이 스며든 이들에게 감명을 받고, 곧바로 서울대 공대 써클 명칭을 '십인회'에서 '산업사회연구회'라고 개칭했다. 전태일 열사가 분신했을 때 학생운동권에서는 '학생운동이 노동의 현장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이와 같은 학생운동의 사회적 명제가 계기가 되어 산업사회연구회 회원 6~7명은 1970년 겨울방학 때 서울 영등포구 오류동에 자취방을 얻어 구로공단, 인천부두, 인천공업지대 등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그런 면에서 윤 원장과 써클 회원들은 전태일 열사 분신 직후 집단적으로 노동현장 체험을 시도한 개척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대 공대 산업사회연구회가 추진한 공활 체험은 하나의 프로그램이 됐고, 이후 2학년 때부터는 공장에서 한 달 현장체험을 하는 게 전통이 됐다. 대학 운동권 내에서 가장 먼저 노동현장 지향적인 써클로 자리 잡았고, 학생운동권 내의 방향을 잡아 준 획기적인 일로 노동운동사에 남았다.
다른 학생 운동권들은 노동현장을 알아야 한다고 하면서도 서울대 공대 산업사회연구회가 했듯이 집단적으로 공활을 가지는 못 했다. 그때 유일하게 찾아온 이가 후배 김문수였다. 71년 여름방학에 김문수를 비롯해 서울대 상대 써클 '이론경제학회'에서 4명이 김근태 선배를 통해 연락을 해왔다. 윤 원장은 이들에게 영등포산업선교회 조지송·김경락·안광수 목사를 소개해주고, 취업게시판과 전봇대 구인광고 등을 통해 구로공단과 문래동 공장지대에 취업하는 방법을 전해줬다.
"그런 것들이 계기가 돼서 김문수 등을 전태일 열사의 모친께 소개해줬지. 나를 비롯해 산업사회연구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한 친구들이 현장 지향성을 갖게 됐어."
- 3편 "태극기부대 핵심 서경석, 당시엔 학생운동 개척자였지"(
http://omn.kr/1qcqo)
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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