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자 인물 관계도역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이병길
밀양에 남아있던 모친의 병 소식을 듣고 우담은 앞뒤 생각 없이 산문을 뛰쳐나와 밀양으로 갔다. 그녀의 병간호로 모친은 완쾌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밀양 관아에 붙들렸다. 유수형(流囚刑)의 죄인이었고, 관기(官妓)의 적(籍)을 무단이탈했기 때문이다. 이때 밀양부사는 아버지와 죽마고우였던 정병하(1849~1896)였다. 그는 농업을 진흥시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동양과 서양의 농학을 종합한 <농정촬요(農政撮要)>를 편찬하였으며, 낙동강의 둑을 막아 농토를 넓혔다. 김옥균의 영향을 받은 개화파 정치인으로, 1894년 갑오개혁, 1895년 을미개혁에 참여했다. 을미사변(민비시해사건) 당시 일본 낭인들이 침입한 것을 알면서도 아무 일이 없다고 거짓 보고를 했다. 을미사변 이후 명성황후의 폐비를 주장하였으며 김홍집 내각의 단발령 때 직접 고종의 머리카락을 잘랐다. 적극적 개화파였던 그는 1896년 아관파천 후 역적으로 몰려 김홍집과 함께 군중에게 피살되었다. 그의 동료였던 유길준, 조희연, 장박, 우범선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1884년 정병하가 밀양부사를 떠나기 전날 밤, 배정자는 군수의 처소에 들어가 작별연을 베풀며 모녀의 생명을 애걸하였다. 군수는 오사카에 사는 안경수에게 편지를 써 주었다. 배정자는 정병하 부사가 소개해준 조선의관으로 차림새를 꾸민 스무살 가량의 삭발한 승려처럼 보이는 일본인 청년 마쓰오를 따라 일본으로 갔다. 일제의 <배정자 약력>에 따르면, 12살 때 기생으로 있었던 배정자는 22살(1888) 때 동래순포청 사령으로 있던 오빠 배국태와 같이 근무했던 청장 김의순의 알선으로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배정자는 10년 동안 경상도 일대를 기생으로 생활한 듯하다.
배정자, 일본에서 밀정 교육을 받다
배정자는 일본에서 자기 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준 남자를 만난다. 조선인 안경수, 김옥균 그리고 일본인 이토 히로부미가 그들이다.
<배정자 실기>에 따르면, 안경수(1853~1900)는 살림살이는 좋은 편이 아니었지만, 분남을 지극히 사랑하여 공주를 대하듯 하였다. 구마모토 소학교에 입학시켜 일본어, 문화와 생활을 배우게 하고 가르쳤다. 경제가 더욱 어려워져 안경수는 오사카 히라노마치로 이사를 하여 증권거래 소개업에 종사하였다. 다소 형편이 풀려 분남을 천황사(天皇寺) 소학교에 편입시켰다. 6개월 뒤인 1886년 7월 동경에서 온 편지를 받고 안경수는 배정자와 함께 오사카와 고베를 거쳐 동경에 도착하여 대도여관(大島旅館)에 투숙했다. 여관에서 1개월 머물다가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1851년~1894)을 만났다.
안경수는 양육의 어려움이 있어 분남에게 여자티를 버리고 남장 생활을 권유하였고, 이름도 배정자에서 조난석(趙蘭石)이라 바꾸었다. 그리고 김옥균의 문도(門徒)에 들게 하였다. 조난석은 김옥균에게 신학문을 배우고 김옥균의 서신을 팔거나 학자금 모집을 하였다. 이 당시에 밀양 기생 시절 만났던 첫사랑 전재식(田在植)을 다시 만났다. 대구 중군(中軍) 전도후의 아들 전재식이 일본으로 유학을 오자 배정자는 그와 다시 만나 결혼하였다. 그러나 배정자의 첫 결혼생활은 당시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 다니던 전재식이 잠깐 귀국했다가 병을 얻어 죽는 바람에 끝장나고 말았다.
이토 히로부미는 김옥균과 친하여 그의 집에 바둑을 두며 오갔다. 수년 동안 잔심부름과 다동역(茶童役)을 하는 과정에 이토의 주시를 받아, 김옥균은 조난석의 신변 안위를 위하여 이토 히로부미에 보내기로 하였다. 이토의 집으로 가게 되었고, 이름도 이토 히로부미가 작명하여 다야마 사다코[(田山貞子]라고 바꾸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문하에 들어간 이래 배정자는 4, 5년간 지극한 보호를 받았지만, 외출은 불허되었다. 배정자의 신분 보호를 위해 별도의 경찰을 두었다. 의복과 음식, 숙소 범절에 있어서 가장 화려하고 특히 식사 때는 이토가 일일이 지휘 감독하였다. 이토 히로부미에게 특별한 교육을 받았다. 말타기(승마), 자전차 타기, 수영하기, 시격술(試擊術)과 시포술(試鉋術), 탐정법, 변장술, 취물법(取物法), 모험적 행위하기, 인가(人家)에 불 지르기 등 정상적인 교육 내용이 아니었고 여자로서 견디기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잘 견디었다.
또 사상 교육을 받았다. 국가관 교육, 한중일 관계 및 역사, 서양 세계 각국 상황, 인종 간의 우열교육 등이었다. 특히 일본은 조선을 등한시하지 않을 것이다. 조선을 완전한 독립국으로 확립해 나갈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조선 독립 없이는 동양 평화가 있을 수 없다. 조선이 독립하여 동양 정국의 중심이 되어 중국과 일본이 연대하여 동양 평화의 길을 열고 나아가 황인종이 세계평화의 길을 밝혀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교육을 받은 배정자는 그를 점차 숭배하게 되고 그의 헌신적 수하가 될 것을 진심으로 다짐하였다. 일본 황후궁 대부 향천(大夫 香川)에게 미려한 의복과 보석을 하사받기도 하고 황실에 가서 명치(明治, 메이지) 왕의 말을 듣기도 하였다.
1916년의 매일신문 <괴물 배정자> 연재에는 김옥균 문하에서 있었던 일과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교육받은 사실이 없다. <배정자 실기>는 그녀의 과장과 시기적 오류가 이 많다. 정병하가 밀양부사에 부임한 것은 1888년이었고, 배정자가 김옥균의 문하에 들어갔다고 할 즈음 김옥균은 오가사와라(小笠原) 섬에 1887년부터 유배 중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