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6일 서울 휘문중학교에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발족을 선언한 여운형이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홈페이지에 수록된 사진)
"남과 북, 좌와 우가 하나 되는 단일민족국가를 만듭시다!" "와~"
1945년 8월 전남 해남군 해남읍 서림에서 열린 여운형의 연설은 말 그대로 포효였다. 청중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쳤다. 해남건국준비위원회가 주최한 이날의 행사는 대성황이었다. 며칠 후 해남에는 인민위원회가 만들어졌다. 미군정이 국내에 진주하기 직전에 건국준비위원회가 행한 전국적 조치의 일환이었다.
해남인민위원장은 해남군 계곡면 방춘리 출신 김정수가 맡았다. 해남군 인민위원회는 해방 직후 지역에서 가장 강력하고 활발한 정치집단이었다. 인민위원회는 군의 모든 부분을 통제했으며, 현지의 버스 운수업, 김 양식업, 초등학교 21개를 운영했다. 1945년 11월 23일 해남에 진주한 미 제45군정 중대는 인민위원회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미군정은 인민위원장 김정수를 해남 초대군수로 임명했다.(해남신문사, 『이데올르기에 갇힌 해남의 근·현대사』)
그런데 미군정은 입장을 바꿔 인민위원회를 탄압했다. 해남에서는 1946년 초부터 인민위원회 탄압이 시작됐고, 그해 11월 11일 '추수봉기' 때 정점을 찍었다. 추수 봉기 지도자였던 김정수는 결국 경찰의 검거를 피해 월북했다. 그와 함께 월북한 허진은 강동정치학원을 졸업하고 헝가리 대사를 역임한 후 <고려신문> 주필을 맡았다. 김정수는 초대 평양시장을 맡았지만 이후 숙청되었다고 한다.
파리떼가 구름처럼 날아다녀
"윙"하는 소리가 마치 비행기가 날아가는 것처럼 들렸다. 수천 마리의 파리떼가 구름처럼 날아다니며 시신의 피를 빨아 먹고 있었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코와 입을 틀어막은 이병희는 어머니 오성례와 제수씨와 함께 동생 이병연의 시신을 찾아 갈매기섬을 헤집고 다녔다. 한여름이라 부패 정도가 심했고, 더군다나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시신은 걸레 조각에 가까웠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병연의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이병연의 아내가 자신의 바느질 모양새를 보고 남편임을 확인했다. 1950년 7월 진도 갈매기섬에서 죽은 이병연은 일제 때부터 농민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그 이유로 1949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됐다.
이병희가 동생의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던 것은 갈매기섬 생존자 박태운(산이면 업자리)이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박태운은 인공 시절 산이면 분주소장을 했는데, 그는 마을에서 '박태길'로도 불렸다. 수복 후 경찰은 박태길을 잡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그런데 같은 마을에 박태길과 동명이인이 있었다. 경찰은 다른 박태길을 붙잡아 부역혐의로 산이면 진산리 '뻔지'에서 죽였다.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죽은 박태길은 다름 아닌 이병희의 처남이었다. 경찰이 실제로 잡으려 했던 박태길 역시 진산리 '뻔지'에서 학살됐다.
이병연 집안은 해남군 마산면에서 지조 있는 집안으로 유명했다. 이병연 아버지 이경식은 해남읍, 송지면, 완도 등지에서 서당 훈장도 했고, 한의학을 배워 한의원도 열었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창씨개명도 거부하고 채권구매 강요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이병연도 일찌감치 농민운동을 통해 사회변혁을 꿈꾸었다. 이병연의 외사촌 형 오장록은 해방 직후 해남군 농민위원장을 맡았고, 이종사촌형 허진(해남군 산이면)은 김정수와 함께 월북했다.
그리고 이병연은 보도연맹사건으로 갈매기섬에서, 이병희는 부역혐의사건으로 붉은데기에서 학살당했다. 때문에 이병희·이병연의 여동생인 이혜영에게 시어머니가 '빨갱이 집안' 운운한 것이다. 사실 이혜영의 남편 윤기봉 역시 일제강점기부터 농민운동을 한 사실은 앞에서도 밝힌 바 있다.
소도 말을 안 들어
큰아들(이병희), 작은아들(이병연), 사위(윤기봉)을 6.25 전쟁에 잃은 아버지 이경식은 화병으로 1953년 사망했다. 그러다 보니 집안에 남정네라고는 이병희 아들 이창준을 포함한 그의 어린 형제들만 있었다. 이창준의 할머니, 어머니, 고모가 한집에 살았다. 한 울타리에 과부가 셋이었다. 1955년 이창준의 할머니 오성례도 화병 때문에 중풍이 와 쓰러져 세상을 떴다. 이창준 집안은 5년간 6명이 줄초상을 치른 것이다.
이창준 집안은 마을에서 '빨갱이 집'으로 호가 났다. 품앗이도 해주지 않고, 같은 마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니 결국 이창준은 어릴 때부터 농사일에 매달렸다. 친구들이 가방 메고 학교 다닐 때 그는 쟁기질을 해야만 했다. 결국 그는 초등학교 졸업으로 가방끈이 끊어졌다. 또한 이창준의 형 이창배 역시 쟁기질을 했는데, 웃지 못할 상황이 연출되었다. 이창배는 키가 작아서 쟁기 뒤에 서면 보이지도 않았다. 그나마 소도 말을 안 들었다. 꼬맹이라고 소가 코웃음을 친 것이다.
이창준은 농사를 지으면서나 1968년 해병대에 입대해 1970년 베트남전쟁에 자원을 하면서도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녔다. 군 제대 후 직장 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광주항쟁에 시민군으로 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