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 달리기는 전신거울이 없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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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달리기를 할 때는 인간의 한계가 느껴졌다. 숨이 턱에 차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숨을 고르며 참고 참았다. 그렇게 걷기 반, 달리기 반의 5km를 끝냈을 때, 나는 다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남편을 따라 뛰지 않겠노라 결심했었다. 그러나 그 횟수가 한 번, 두 번 계속될수록 숨이 턱까지 찰지언정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 같지 않았다. 나중에는 상쾌함마저 느껴졌다.
겨우 5km를 달리면서 이게 바로 달리기하는 사람들이 말하던 '러너스 하이'인가 하는 주제넘은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달리기는 전신거울이 없어서 좋았다. 달리는 동안 아무도 서로를 신경쓰지 않는 자유로움, 익명의 순간에 느끼는 혼자만의 성취감.
그런데 달리기의 효과는 의외의 곳에서 찾아왔다. 바로 체력의 변화였다. 나는 늘 바닥을 뚫고 내려간 체력으로 살았던 터라, 일상이 매일같이 깔딱고개였다. 매일매일 남들 하는 만큼 집안일을 하고 밥을 하고 아이를 키웠을 뿐인데 매번 내 안의 모든 에너지를 쥐어짜야 그 일상이 가능했다. 게다가 운동을 하고 온 날엔 하루의 체력을 모두 소진한 듯 누워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달리기를 한 후엔 뭔가 달랐다. 한 달 두 달 시간이 보태지면서 이쯤되면 넘어야 할 깔딱고개를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너무나 신기했다. 신기하니 자꾸 달렸다. 달리면 달릴수록 나는 점점 깔딱고개와 이별하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이별이었다.
예전에 드라마 <미생>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네가 이루고 싶은 게 있다면 체력을 먼저 길러라. 평생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되거든 체력을 먼저 길러라. 게으름, 나태, 권태, 짜증, 우울, 분노 모두 체력이 버티지 못해 정신이 몸의 지배를 받아 나타나는 증상이다. 체력이 약하면 빨리 편안함을 찾게되고, 그러면 인내심이 떨어지고, 그 피로감을 견디지 못하게 되면 승부 따위는 상관없는 지경에 이르지. 이기고 싶다면 네 고민을 충분히 견뎌줄 몸을 먼저 만들어. '정신력'은 '체력'이란 외피의 보호 없이는 구호밖에 안돼."
예전엔 머리로만 이해했던 이 훌륭한 대사를 나는 요즘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다. 달리기에 이어 자전거에 빠진 요즘, 나는 이 맑은 가을날씨를 만끽하며 페달을 밟는다. 온전히 나의 에너지로 달리고 그리고 온몸으로 맞는 가을바람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순간이다.
비록 페달을 구르는 속도는 느리지만 우리나라 곳곳에 펼쳐진 예쁜 자전거길, 둘레길을 누려보는 재미를 알게 되었고, 산책로를 따라 넓게 펼쳐진 꽃들의 향연 또한 덤으로 주어지는 볼거리다.
마흔 넘어 매번 소풍 나온 기분으로 변해가는 계절을 온 몸의 감각을 총동원해 느껴보는 건, 생애 처음 지치지 않는 몸이 주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게 된 덕분이다. 체력이 주는 소중함은 세상을 바라보는 내 눈을 달라지게 했다. 무엇을 시작하기에도 늦지 않았겠지만 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또한 어떠리. 분노하지 않고 사랑하며 살 수만 있어도 참으로 선물같은 인생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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