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은 변함이 없고, 세상은 어제와 같고, 나는 이렇게 힘든데, 타인의 편안함은 허무한 기분만 들게 한다. 이 심리 상태에 한국 사회는 '박탈감'이라는 단어를 붙였고, 이것을 합리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여기에 전체주의적 '연대 책임'으로 해결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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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초적인 평등만을 강조하는 한국의 징병제
한국에서 공정과 공평이라는 단어는 많이 오염되었다. 한국이 오랫동안 군사독재를 겪으며 전체주의와 군사주의가 익숙한 사회여서 그런지, 모두가 "단체 기합"이나 "연대 책임" 같은 단어에 너무 익숙하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고통받고 있는데 바로 옆 타인이 고통받지 아니하는 것은 개인주의나 요행수로 인식되곤 한다. 현실은 변함이 없고, 세상은 어제와 같고, 나는 이렇게 힘든데, 타인의 편안함은 허무한 기분만 들게 한다. 이 심리 상태에 한국 사회는 '박탈감'이라는 단어를 붙였고, 이것을 합리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여기에 전체주의적 '연대 책임'으로 해결하려 했다.
징병제도 하의 평등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굉장히 1차원적이다. 물론 이는 그와 동시에 굉장히 선명한 이미지와 결과물을 형성해 낸다. 근대 이후 징병제가 가진 강제적 평등성은 그 자체로 '준(準)민주주의'적 성격이 있어서, 민주시민으로서의 탈계급성을 체험하게 해 주었다.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는 "실제로 군대에 들어가면 일반 사회에서 사회적 지위나 가문 등을 (중략) 조금도 말하지 않고, 귀족 도련님이 노동자 상등병에게 따귀를 맞고 있다. 무엇인가 준데모크라시적인 것이 사회적인 계급차이에서 오는 불만의 마취제가 되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라고 이야기한다.(일본의 군대. 논형, 2005년)
이런 일들은 한국군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농촌 출신 비정규직 선임병사가 언제 또 서울대 출신 후임병에게 지시와 간섭을 할 기회를 가져 보겠는가.
하지만 민주화가 진행된 2020년의 한국에서 병역의 평등이란 더 말초적이라서, 모두 "불편한" 곳에서 "불편한" 잠을 자고, "불편한" 식사를 하며, "불편한" 월급을 받고, "불편한" 얼차려를 받으며, "불편하게" 감금당하는 것으로 인식되곤 한다. 그리고 이것에 의문을 품거나 개선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군대는 원래 그런 곳'이라는 믿음을 거스르는 이단자가 된다.
그런데 사실 대부분의 군대는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모두'를 강제로 징집하지도 않으며, 각자 임무와 목적에 따라 다른 방식의 군 복무를 하는 경우도 많으며, 적정 수준의 보상을 주는 국가들도 많고, 경우에 따라서는 개인의 가정 형편에 따라 집과 가까운 곳에서 출퇴근하며 군 복무를 하기도 한다.
이렇게 말초적인 평등만을 부여잡고 있다 보니 군 복무에 대한 논의는 계속 제자리를 맴돌 수밖에 없다. 더 나은 상황을 만들고자 화두를 던져도 언제나 군 복무는 하향평준화를 기본 기조로 논의된다. 현재의 징병제를 축소하거나, 선택적 징병제로 전환하거나, 모병제와 사회복무제를 병치하는 방식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러자면 그 이전에 쌓아왔던 "불편한 군대"의 신화가 훼손되는 것을 껄끄러워하는 사람들이 어김없이 어깃장을 놓는다.
하향평준화가 형평성의 기준이 되어버린 한국의 대체복무